0. 기본 공리

운명을 탓하려면 우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

by 임지성의 생각



취지:


이것은 '일기'다.


'일기'라는 글쓰기는 보통 기록을 위한 기록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서 상정되는 읽는 이는 대게 미래의 불특정한 시점의 글쓴이 자신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시 되살리고자 하는 습관은 흔한 습관 보다는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의 습관에 가깝다.


이것은 '반성적인 일기'이며, '전술적인 상황 일지'다.


내가 이 일기를 위해 이론적인 모범으로 채택한 습관은 17세기 영국인 존 오웬(John Owen)의 습관이다. 그 무렵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성서를 해석하는 작업과 교리를 도출하는 작업, 도출된 교리를 매일의 행동 강령으로 발전시키는 작업, 그리고 매일의 삶을 그 행동 강령들을 실험하는 시행착오의 터전으로 탈바꿈하는 작업 등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실천하곤 했다.


존 오웬이 이러한 습관을 일기로 남긴 것은 아니다. (그렇다는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엄격한 청교도 윤리를 준수하려는 자기 감시의 원리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제시해주는 모범 사례다. 그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행동을 추동하는 생각과 감정과 기분의 상태를 '성향적인 운동'(disposition)으로 파악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론적인 기반이나 목표는 다르지만) 어쩌면 막스 베버(해석적 사회학)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가 19세기에 실천했던 '행위 이면의 원인'에 대한 해석 또는 분석을 두 세기나 앞지른 사례라고 평가해도 과하지 않은 평가일 수 있다.


비록 존 오웬의 일기가 사료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교도적인 자기 감시를 일지의 형식으로 남긴 매우 유명한 사례가 있다. 바로 18세기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사례다. 브레이너드와 오웬의 관계가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브레이너드가 죽은 뒤 그의 일지를 출판하고 생전에 그와 교분을 통해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미국인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오웬의 글에게서 받은 영향은 그 자신의 글에서 꽤 선명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내가 선교사를 꿈꾸며 신학교에 다녔을 무렵, 나는 이 세 사람(오웬, 에드워즈, 브레이너드 등)의 저작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브레이너드의 일기 습관이야말로 (비록 개인적인 평가에 불과하지만,) '오웬 신학의 가장 뛰어난 모범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나 역시 한동안은 브레이너드의 실천을 본 받아, 사적인 반성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신학적인 사고의 성격을 유지하는 일기 쓰기를 습관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그 시절 내가 썼던 일기는 일찍이 직접 파기해버렸다. 너무도 부끄러운 일들이 노골적으로 담겨있었고, 점차 내 신학생으로서의 정체성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기에 그 글들을 남겨둘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브레이너드의 일기 역시 최종적으로는 에드워즈의 결심으로 출판되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브레이너드도 그 일기가 사후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일기 쓰는 습관을 소생시키려는 데에 딱히 '경건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제 경건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 된지 오래이다. 어릴 적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신앙을 스스로 회의했다가 중학교 말미에 다시 신앙의 세계에 깊게 몰입하게 된 과정과는 달리, 내가 신학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경험했던 전회(배교)는 매우 정치하고 엄밀한 방법론적 비교를 통한 과정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내가 견지하고 있는 신학적인 회의는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많은 이들의 고민과 대답을 두루 살핀 결과이며, 따라서 내 배교는 절대적으로 비가역적인 사건이고, '열두 살의 배교'와는 판이한 역사다.


아마 내가 다시 일기 쓰는 펜을 손에 쥐는 목적은 '자책하고 싶지도, 발뺌하고 싶지도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추측하는 듯한 어조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일기가 시작 단계에 있을 뿐이고, 여기에 약속된 결말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떠나며 신앙의 세계를 함께 졸업했을 때부터 줄곧 나는 철학을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재구성하려 노력해 왔다. 1차 문헌을 취급한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거창하게 떠벌일 만한 철학을 체득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몇 가지 인상을 획득하기는 했다. 그중 하나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하려면, "뭐(?) 빠지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교훈의 공헌을 주로 카뮈(Albert Camus)와 니체(Friedrich Nietzsche)에게 돌린다. 비록 카뮈는 노동자의 편에서 말하고 니체는 엘리트의 말투로 말했지만, 이 두 사람이 공히 강조했던 교훈은 최선을 다해 부조리한 운명에게 저항하는 인간만이, 달성 여부를 떠나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삶 전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점이다. 아마 이 일기를 통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경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브레이너드 일기가 아무리 좋은 모범 사례일지라도, (경건한 삶을 배신한 이상) 이를 다시 존 오웬식의 청교도적 자기 감시로 회귀하는 방식으로는 채택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청교도 신학자들보다 십수 세기 앞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처럼, 내 습관이 점지하는 운명이 어떤 것인지 감시하고 통제하고 싶다.


그는 인간을 동물 범주 안에서 '본능'에 이끌리는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이성'을 통해 원리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측면에서 규격 외의 존재로 인식하기도 했는데, 이 두 차원의 균형을 통해 'well-beging(eudaimonia)'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균형(중용)'은 본능적인 행동의 산출을 견제하고 과도함과 부족함을 절제하는 '습관(habitus)'으로서의 '덕(arete)'을 말한다. 그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조건화 된 '습관'이 한 인간의 '성품'을 만들고, 그 성품이 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명관이 그가 죽은 뒤 로마 제국에서 유행했던 '체념의 철학(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즉 쾌락의 철학과 숙명의 철학을 통틀어서 일컫는 나만의 용어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후배 철학자들의 운명관이 매우 퇴행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진보적인 형태의 운명관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쳐 주었던 니체도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적인 원리가 주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디오니소스의 정신(정념과 해체의 원리)과 아폴론의 정신(이성과 질서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 역시 이 두 요소를 '균형'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다소 기계적인 저울질에 가깝다면, 니체의 균형은 '긴장 속의 균형', '역동적인 균형'에 더 가깝지만, 역설적인 원리를 인식하고자 했던 취지와 숙명론을 극복하는 책임론적 운명관의 취지 만큼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사유가 통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 보다는 비-정형적이이면서도 탈이상주의적, 실천 지향적이어야 하고, 니체의 문학 비평 작업 보다는 훨씬 자기 반성적이고 사적이어야 한다. 그 점에서 나는 오웬이든 브레이너드든 내가 배신했던 세계의 선배들의 모범을 얼마든지 따르고 싶다. 하지만 나는 확정된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천로역정의 정신 보다는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는 내 삶의 결과에 더 열심히 가담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아마 여러 과정을 통해 발생한 결과들 중 '어쩔 수 없었던 일들의 영역'과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들의 영역'을 세심하게 구분하는 작업일 것이다.


즉 내 운명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위한 몇 가지 공리들을 설정하고 내 생각과 감정과 기분과 행위의 정체를 규명하고 운명과 화해하는 것. 우선 그것을 목표로 이 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느낀다.






공리들과 양식:


1. 공리들


가. 내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매일 벌어진다.


나.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고, 어떤 일들은 내가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 나의 뜻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방식이 다른 여러 요소들이 있으며, 나는 그것들과 그 영향력을 감시하거나 반성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절제하고 내 운명에 책임을 지는 데 매우 유용하다.


1)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① 과거 사건에 대한 외상과 왜곡적인 기억, 본능적인 욕구들과 상충하는 현실적인 제약들, 무의식적인 정동들과 물리-화학적인 기전들

② 내가 살면서 키워온 사회적인 역량이나 현실적인 조건들

③ 반복적인 행동과 시행착오를 통해 조건화된 나의 습관과 성향들

④ 그 밖에 내가 떠올리게 될 수도 있는 잠재적인 요소들


2) 나는 이것들이 내 생각과 감정과 기분과 행위들에 미치는 힘을 감시하고 반성함으로써, 그리고 이것들이 배태하는 결과들을 미리 선취하고 그것을 내가 의도하는 운명과 비교함으로써 내 운명을 조향하려 들 것이다.


라. 그러나 모든 것들을 이성과 의지를 통해 휘어잡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고, 여전히 나는 크고 거센 강물 위에서 헤엄치는 고기와 같을 것이다.


마. 그럴지라도 나는 살아있는 한 시체와 같이 떠내려가기 보다는 몸부림치는 삶을 택할 것이다.


2. 양식


가. 오늘 내가 처한 상황과 주요한 사건들


나. 그 속에서 경험한 생각과 감정의 우세했던 흐름


다. 내가 취한 행동들 중 내 진중한 의도가 반영된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


라. 인과적인 분석


마. 운명적인 요소와 극복 가능한 요소의 구분


바. 짧은 반성과 새로운 결심


이 일기가 매일 쓰는 일기가 된다면, 아마 나는 이 습관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너무 가끔 쓰게 되더라도 오늘 결심했던 취지를 빠르게 잊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일기를 쓰는 일에도 과유불급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어차피 브레이너드도 356일 일기 쓰는 일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필요에 따라 주기와 분량을 달리하며 일기 습관을 지혜롭게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취지일 것이다.


이것은 '일기'다.

그리고 이것은 '반성적인 일기'이며, '전술적인 상황 일지'다.


목표는 내 운명에 직접 가담하여 가능한 한 그것이 내 탓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운명을 탓하려면 우선 내가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