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르네』 (René)
*불문과 소설 원어 강독 수업에서 숙제로 제출한 비평•감상문입니다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로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작가, ‘빅토르 위고’가 지금처럼 대문호의 반열에 이르기 전 습작생 시절 적은 메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샤토브리앙이 될 수 없다면 그 무엇도 되지 않겠다.’
18세기의 막을 내리고 19세기 자전적 낭만주의 소설의 막을 걷어 유행을 이끌어 낸 작가 ‘샤토브리앙’은 어째 사람 이름보다는 스테이크 이름으로 친숙하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은커녕 그의 존재조차 낯설다. 오늘은 그가 자신의 이름 ‘르네’를 주인공으로 지은 자전적 소설, 『르네』에 대하여 썼던 글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세계를 흐르는 시간은 고리처럼 순환한다. 지구의 자전에 의해 변화하는 태양의 위치로 하루가, 달의 자전으로 변화하는 달의 모양으로 한 달이, 지구의 공전에 의해 변화하는 날씨로 1년이 가고 새로운 하루, 한 달, 1년이 돌아온다. 그러나 지나간 하루, 한 달, 1년은 새롭게 돌아오는 그것들과 전혀 다르다. 순간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이것을 우리는 죽었다고 부른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이 단위들은 하나의 탄생으로 존재했다가 죽음으로 소멸하는 ‘삶’, ‘생’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저녁, 겨울 등의 시간은 죽음이라는 상징과 일대일대응을 이루며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글을 쓰는 작가와 읽는 독자, 두 주체는 아무리 위태로운 자라도 살아있는,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 전제를 염두에 두고 보면 주인공 르네는 그토록 죽음을 갈망하나 아직 존재하고 있다. 샤토브리앙의 『르네』 14-15쪽에서 주인공이 끝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시간의 상징에 따라, 낭만주의 미학에 입각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가을은 과정이 결실을 맺어 풍요롭다. 가을의 풍경을 색상 스펙트럼에서 본다면 4계절 중 가장 넓은 범위를, 촘촘하고 세세하게 채우고 있다. 결실은 정점이면서 동시에 다음 몰락 이전의 단계이다. 정상에 오른 자에게는 더 이상 오를 수 있는 곳이 없고 추락만이 남아있다. 낭만주의 미학은 가을이 제공하는 수확물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가을을 시간 속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서서히 몰락을 시작하여 폐허로 완성될 예정에 처한 상태로 본다. 르네에게 가을은 죽음을 예보하는 계절이다. 이 작품에서 가을은 독자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역할이다. 또한 가을은 혼란하고 복잡한 계절이다. 가을을 가득 채운 결실들은 다채롭기도 하지만 혼잡하고 무질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incertitudes(불확실성)과 les mois des tempêtes(폭풍우의 계절)이라는 표현으로 명확히 나타난다. 그 속에서 르네는 바람(des vents), 구름(des nuages), 유령(des fantômes) 속을 방황하는 전사(ces guerriers)가 되어 가을의 우울과 혼란에 몸을 내맡기길 바란다. 바람, 구름, 유령은 모두 손으로 잡을 수 없이 형태가 불안정하고, 머무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게 시시각각 위치가 변화한다. 이것은 낭만주의 사조를 발달시키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한다. 이어서 이는 덤불에 불을 피워 손을 녹이는 목동의 운명까지도 부러워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귀족 계급이었던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신의 사회적 계급, 특권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과 의무도 잃었다. 귀족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매우 불명확하고 비물질적인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잃은 샤토브리앙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라는 것이 한 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목동의 의무는 매우 단순하고 확실하다. 그의 의무는 목초지 내에서 풀을 뜯어먹는 양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늑대 등의 야수의 공격으로부터 양을 지키고, 양이 길을 잃거나 무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샤토브리앙의 입장에서 목동의 처지는 추운 날씨에 초라한 덤불에 겨우 불을 피워 손을 녹여야 할 지라도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것이다.
르네(je)가 듣고 있던 우울한 노래(ses chants mélancoliques)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 노래가 행복을 표현하고 있을 때조차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래는 구슬프다(triste)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래는 기교나 노력 없이 목에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소리, 표현이다. 의도적으로 행복을 표현하려고 해도(lors même qu’il exprime le bonheur) 그 본질적 특성을 가릴 수는 없으므로, 위 문장은 인간의 감각과 정서는 우울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르네가 이러한 우울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수용하여 고찰하는 이유가 이어서 나타난다. 르네(notre)의 마음이 불완전한 악기(un instrument incomplet)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악기는 제 음정을 내지 못하므로, 화음을 내지 못한다. 불완전은 조율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뒤에 언급되는 리라(une lyre où il manque des cordes) 역시 현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의 심장, 정서가 조율되지 않은 리라라고 한다면, 각각의 현들을 아무리 울린다 하여도 본래 자신이 연주해야 할 음을 내지 못하고 기준에서 벗어난 음을 낸다. 그러므로 다른 현이나 다른 리라, 악기들과 동시에 소리를 냈을 때 화음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작품 내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르네의 외로움, 사회적 고립을 상징한다. 아무리 현을 울려도 다른 소리들과 어울릴 수 없어 타인과의 교류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르네의 모습을 청각적 심상으로 제시한다. 사교 활동이 어려운 르네가 하루 일과를 보내는 모습은 다음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낮, 오후는 따스한 햇살이 비춰 밝고 온화하다. 우리는 낮에 활동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일과를 보낸다. 태양빛이 적어 흐린 날이면 사람들은 기분이 처지고 기운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태양이 비추는 낮은 생명력, 활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태양은 한낮에 가장 높이 떠 있다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않고 저물어 간다. 낭만주의 미학은 낮을 생명력보다 밤의 이전 단계, 태양이 저물어가는 단계로 인식한다. 그래서 르네는 낮을 ‘밤을 준비하는 단계’로 인식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죽음)는 밤에 있으며,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일과를 보내지 않는다. 낮이면 르네는 히드가 끝없이 펼쳐진 숲(grandes bruyères terminées par des forêts)을 방황했다. 히드는 그 자체로 낭만주의자들의 상징이다. 메마르고 초라한, 작고 듬성듬성한 생김새로 척박한 땅에서조차 홀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가 히드 숲을 방황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몽상(ma rêverie)을 위한 재료들을 수집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몽상은 세계를 지배하거나 금은보화를 가득 얻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우울을 키워줄 낙엽(une feuille séchéeque),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une cabane dont la fumée s’élevait dans la cime dépouillée des arbres), 북풍에 흔들리는 참나무 위에 핀 이끼(la mousse), 외딴 바위(une roche écartée), 갈대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만이 나는 말라비틀어진 연못(un étang désert) 등이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요소들이다. 또한 이 요소들은 속삭임, 재잘거림 등의 가벼운 청각적 특징으로 수식되어 독자가 자연의 소리를 상상하고 느끼게 만든다. 샤토브리앙의 대표적인 특징인 기분 좋게 부드러운 청각적 심상의 자극이 드러난다. 한편 물은 생명력을 상징한다. 낙엽과 연못은 물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생기 없는, 죽은 상태이다. 벽난로에 불을 피워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은 안락한 가정생활,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 위로 올라가는데, 하늘의 신과 닿고 싶은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끼는 식물 중에서도 가장 작고 사소한 것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외딴 바위는 동질감 느끼는 대상 없이 외롭고 고독한 존재를 상징한다. 르네는 히드 숲에서 고독, 외로움, 죽음, 안락한 가정, 유한하고 사소한 인간을 발견한다. 이 중 안락한 가정을 상징하는 오두막은 다른 요소들과 이질적이다. 이는 부모와 유대감 부족과 그들의 이른 죽음을 겪은 르네가 가정이 주는 안정감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낭만주의 미학에서 연기라는 상징이 덧없음, 일시적임, 찰나의 유한성을 의미하는 것을 안다면 오두막이 단순히 긍정적 의소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벽난로에 피워진 불은 장소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지만, 땔감이 다 타고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린다. 르네가 바라는, 그나마 현실적인 소망조차도 부질없는 허상인 것이다. 또한 불을 피워 올라오는 연기는 자신의 이면에 냉정함을 숨기고 있다. 하늘, 신과 닿고 싶은 의지를 상징하는 연기는 높이 올라가지만 이내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낭만주의 미학은 근본적으로 아주 불안정하고 순간적인 대상의 유한성을 포착하고 느끼는 불안의 미학이다.
높이의 이미지를 지닌 상징으로는 첨탑(le clocher solitaire s’élevant au loin dans la vallée)과 새(les oiseaux)가 대표적으로 등장한다. 모두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위치적인 특징을 가진다. 첨탑은 계곡 깊숙한 곳에서 외롭게 솟아오른 형태이다. 새는 사람의 머리 위, 손끝도 닿지 않는 하늘을 누빈다. 고독하고 절망적인 삶에서 구원을 바라며 신과의 대화를 원하고, 시도하는 르네의 염원을 시각적 심상으로 나타낸다. 첨탑은 종교적 상징, 건물로 변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무너지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전통과 보수를 의미한다. 새는 날개를 달고 중력을 거슬러 올라 날아다니는 특징으로 자유, 진보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낭만주의 미학에서 주인공의 시야는 그 인물의 심리, 정체성을 반영한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 중 주요하게 언급되는 두 상징은 르네의 분열된 자아를 각각 대변한다. 르네의 시야에 연달아 들어와 첨탑은 르네가 현재에 머물며 생을 지속하기를, 새는 미지의 세계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모험심을 자극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새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이 이어지고, 그들의 날개에 타고 싶었다(j’aurais voulu être sur leurs ailes)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에 따라 결국 르네는 공간적 이동을 감행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르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노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앞부분에서부터 르네는 자신을 불안정하고 변덕스럽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낭만주의 미학으로 소설을 감상할 때, 주인공은 극심한 불안과 우울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도피가 거의 유일하다. 이때 도피는 대표적으로 시간, 공간, 차원적 도피로 분류된다. 다음 문장에서부터 르네에게는 공간적 도피에 대한 염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은밀한 본능(secret instinct), 자기 자신을 단지 여행자로 여긴다(je sentais que je n’étais moi-même qu’un voyageur)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때 다시 한번 르네의 현실도피는 종교에 의해 좌절된다. 르네의 마음에는 도피에 대한 거대한 갈망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종교심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심은 무조건적으로 도피를 막지는 않는다. 죽음의 바람(le vent de la mort se lève)이 불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때가 왔을 때 떠나면 이상향으로 갈 수 있다고 예언한다.(ces régions inconnues que ton cœur demande) ‘죽음의 바람’은 삶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불행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내내 르네의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를 서술하고 있지만 정작 르네의 정서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한 유년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많이 가미되어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 한다. 이후 작품의 흐름을 보았을 때, 죽음의 바람은 누이와의 근친상간적 애정을 깨닫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다음 문단에서는 구체적인 ‘죽음의 바람’이 ‘그리움의 폭풍(orages désirés qui devez emporter René dans les espaces d’une autre vie)’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이 그리움의 폭풍은 르네를 다른 삶의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 다른 삶(une autre vie)은 다른 차원의 삶으로 죽음 이후의 생을 의미한다. 공간적 차원이나 시간적 차원의 도피 역시도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동을 통해 ‘현재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가 태어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지독한 현실에서 도피하기를 바라고, 도피한 곳에서 행복과 안정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넣을 불행한 사건을 갈망하지만, 르네는 그 사건을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못 한다. 그저 발생하기 만을 기다린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샤토브리앙의 경험에서 비롯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였고, 그의 관점에서 대혁명은 비극이었다. 감내하기 힘든 사건이 인생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여 알고 있고, 그러한 사건을 이미 경험하여 인생에서 더 이상 어떤 소망을 성취하거나 임무를 수행하려는 의지가 꺾인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흥분시키는 것뿐이다. 다음 문장에서 바람 속에서 머리를 흩날리며,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큰 보폭으로 걸었다는 서술을 통하여 그가 정신적으로 고양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소극적이고 우울한 르네는 오직 죽음만을 생각할 때 흥분할 수 있다. 낮에는 모순적으로 죽음만이 그를 살게 한다. 죽음은 그의 삶의 연료가 된다. 그것은 이미 다 타버려 재가 된 르네의 삶에 작게나마 불씨를 피워주는 존재이다.
소설 속 르네에게 주어진 가을, 낮의 시간들은 결국 밤, 겨울로 입문하기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 낭만주의를 사는 이들에게 열매와 빛은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날들은 불행한 날들을 위해 존재하고 이는 곧 생은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 느끼기 위해서는 살아있음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그 누구도 죽음을 느껴본 자는 없다. 죽음은 감각적 생의 마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르네는 죽음에서 살며 죽음을 느끼고 있다. 낭만에는 감각적인 쾌락이 가득 차 있으므로 줄곧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진다. 낭만을 좇는 삶은 부러움을 사고,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낭만의 태동은 죽음과 맞닿아 있으므로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이 시작에는 피로 얼룩진 프랑스 대혁명, 피로 얼룩진 샤토브리앙의 가계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를 ‘죽음을 살다’라고 요약한다면, 낭만주의의 시작을 연 샤토브리앙의 작품은 최초로 죽음을 사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샤토브리앙 작품의 자아숭배적 성격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이 느끼는 죽음에 집중하면 꽤나 설득력이 생긴다. 그의 작품들은 죽음이 존재하므로 삶이 존재하고, 우리가 모두 죽기 위해 태어나 죽음을 목표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근대적으로 일깨운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이 꾼 꿈은 아름다운 백일몽이 아니었다. 한 밤 중의 악몽, 고통 속의 착란이었다. 그 꿈에 아무리 아름다운 시절과 장소가 등장하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