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화가 나는 걸까
하루 휴가를 내고 산부인과를 방문한 날이었다. 소중하디 소중한 휴가를 쓴 날이었기에 평소 크게 계획을 세우지 않는 성격임에도 이 날 만큼은 촘촘히 계획을 세워놓았다. 미리 예약이 불가하다고 해서 일부러 일찍 도착한 병원에서 나는 2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1시간이 넘어갈 때쯤 카운터의 직원에게 물어봤다.
"앞에 혹시 얼마나 남았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음 보자... 오늘 손님이 많아서 한 1시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네? 1시간 더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그래도 설마 1시간을 더 기다리겠어, 일부러 좀 더 부풀려서 말한 걸 거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손가락은 넷플릭스를 켰다가, 전자책을 켰다가, 유튜브를 켰다가 하며 헤맸고 정신은 이리저리 방황했다. 1시간 30분째, 분명히 쨍쨍한 하늘을 보며 들어왔는데 어느새 바깥세상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 걸 보면서 어딘가 울컥했다. 내 소중한 휴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다니. 분노가 점점 올라오더니, 종국에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억울한 감정이 들고 눈물까지 차올랐다. 나도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게 처음이라 스스로의 모습에도 당황하고 이 상황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병원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두 시간씩 기다려본 적은 처음인지라 참 낯설고 황당한 상태였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은 다루기가 참 어렵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 나약하거나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아무리 화가 나도 그 분노를 잘 통제해야만 건강하게 사회화된 어른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분노가 튀어나와도 꾹꾹 눌러담고 무시하기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날은 그 분노를 그대로 곱씹으며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생각해 보았다.
[분노의 진짜 이유]
단순히 2시간을 기다린 것 자체보다는, 그 2시간을 제대로 보낼 줄 모르는 나 자신에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은 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라 누구와 통화를 할 수도 없고, 몰입할만한 재미있는 영상도 없고, 근처에 딱히 가고 싶은 카페나 갤러리도 없다는 사실에 더 크게 분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진찰 전이었지만,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빨리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컸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그 불안감이 분노의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마치, 시험 성적 발표가 예정보다 2시간이 지났을 때 느껴지는 그 초조함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생각의 전환]
이 상황에서 나를 달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주말이잖아, 그때 또 푹 쉬면 돼." 혹은 "병원에서 볼 일 금방 보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혹은 "창문 밖에 봐봐,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네." 혹은 "그만큼 의사 선생님이 환자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봐주고 있다는 걸 거야"라는 식으로 나를 분노를 잠재웠다. 용암처럼 부글거리던 뜨거운 느낌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 상황에서 데스크 직원이나 의사한테 화를 낸다고 해서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분노를 다루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시한폭탄을 가까스로 해체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분노와 마주한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타인이 내 영역을 침범하거나 피해를 입혔을 때, 나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상황이나 사람이 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을 때 등등. 그런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드는 건 나빠"하면서 외면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아, 자연스러운 거야. 이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생각해 보자"라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이 변덕스러운 아이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