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일기든 영상이든 블로그든 뭐든.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께 혼나기 싫어서 썼고, 중고등학생 때는 질풍노도의 사춘기적 감정과 학업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근본을 모를 분노와 우울을 분출할 곳이 필요해서 썼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내가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그리고 그냥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그렇게 차곡차곡 일기를 써갔다.
첫 직장에 들어가고서 성격이 참 좋은 언니를 만났다. 오빠들이 "쟤 일기를 되게 꾸준히 쓴대"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일기를 쓰면 괜찮은 사람이 되는구나. 코 쓱. 내가 생각하기에 일기를 쓰다 보면, 하루에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성찰할 수도 있고, 실수를 했다면 그걸 자책하기도 하고, 그런 모든 부끄러움과 실수와 자책들을 쏟아붓고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내 행동과 생각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고, 자기 성찰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나아질 길목이 좀 트이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이 싸울 때도 그렇잖나. 다른 사람에게 마냥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보다는 '나한테도 잘못한 점이 있을 거야'라고 한 번 되돌아보는 사람이랑 대화가 통하는 거. 물론 자아성찰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비난의 화살이 온통 나에게 돌아와서 힘들 때도 있다. 내가 그랬다. 연인이랑 싸울 때도 항상 '내가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아니면 '내가 좀 더 고치고, 맞추면 괜찮아질 거야' 하다가 결과적으로 나만 힘든 연애를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음, 무거운 얘기는 아니고. 가끔 삶이 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다들 그렇지 않나. Jay Shetty라는 미국의 한 정신건강 구루(?)의 팟캐스트를 종종 듣는데, 그 팟캐스트 이름이 <On Purpose>다. 삶의 목적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팟캐스트랄까. 뭔 목적이냐, 그냥 매일 즐겁게 살면 되지, 하는 생각도 있다. 근데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이 살다 보면 가끔은 또 뚜렷하고 강한 목적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삶의 목적은 뭘까, 나는 뭘 위해 이 삶에서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바쳐야 할까. 그런 생각들.
그 고민은 회사 다닐 때도 계속되었다. 내 몸뚱이 하나를 먹여 살리는 건 숭고한 일이지만서도, 가끔 '이렇게 회사 - 집 - 회사 - 집 하는 삶에서 무슨 목적이 있지, 이렇게 돈 벌어서 내가 뭘 이루고 싶지'하는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고는 했다. 인생에 뭔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희망이나 목적과 같이, 내가 바라보고 달릴만한 게 없어진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는 우울감인지 무기력감인지 뭔가 무겁고 어두운 감정들이 나를 짓누르고는 했다.
그때 비로소 일기를 쓰는 행동이 나에게 갖는 의미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5년 전, 10년 전 썼던 일기를 꺼내보다 보면, '아 그때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별거 아니네' 하는 일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게 내 개인적인 기록이다 보니 당연히 공감도는 100%고.
이제 힘든 감정을 갖고 일기를 쓸 때면, '1년 후, 3년 후, 5년 후에 이 일기를 읽고 있는 나는 참 행복하고, 마음 편한 상태일 거야' 하는 마음을 갖고 쓴다. 이 일기를 읽을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는 좀 더 괜찮은 상황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그리고 그렇게 쌓아온 내 과거가 나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지금도 결국 지나가는 시기일 것임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