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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Mar 07. 2022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

독일에서 본 한국 대선과 정치  토론 문화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본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관련해 지난 2월 말, 독일의 정론지 디 자이트(Die Zeit)에 한국 대선 관련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상황이 낯선 독일 독자를 대상으로 지면이 부족했을 텐데도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정책이 탄생한 한국의 현실과 그 실현 전망까지 정리한 좋은 기사입니다.


최근 이러한 독일 내 시각을 소개하는 클레어함님의 기사가 제 짧은 논평과 함께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링크)

오늘 보니 다음 포털에 만 6천 개의 추천과 3천 개가 넘는 댓글, 천여 개의 "화나요"가 달렸네요. 

예상보다 열띤 반응을 보며 '정론', 언론의 '정파성' 그리고 생산적인 논쟁 문화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마지막 부분에는 

"금융시장 양극화에 따른 금융 약자"인 "서민들의 고통"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해당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적절한 대처 방안이 대선 후보자들의 공약에 포함되었는지를 따져보자는 의도가 

기사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위 자이트지 기사 역시

인터뷰에 응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대한 선호 여부보다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에 대한 펠릭스 릴(Felix Lill) 기자의 평소 관심이 완연히 드러납니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친분이 있는 릴 기자는 동아시아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는 언론인이자 연구자입니다.

기사를 읽으면 독일에서 보편적인 사회적 의제의 하나로 논의되는 기본 소득이라는 사회적 의제가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다뤄지는지 궁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관련 정책에 있어 인터뷰 당사자인 이재명 후보의 공약에 큰 흠이 있었다면

두 기자 모두 이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지적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다루는 주제에 대해 글 쓰는 이들의 진정성이 선명히 표출되어 있기에 해보는 짐작입니다.

이렇게 표현된 진보적 성향이라는 '정파성'은 진영 논리에 무조건적으로 복무하는 정파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과 판단의 기준을 선명히 밝히는데에서 나오는 입장이기에

진영논리와는 반대로 자기 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으며 생산적인 논쟁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니, 이렇게 뚜렷하게 차이를 드러낼수록 진영을 넘은 더욱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합니다. 


당연하지만 독일에도 복잡다기한 정치적 진영이 존재합니다.

기사가 실린 지면인 독일 디 자이트지에도 분명 정치적 색깔이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약 110~120 쪽(!) 분량으로 발간되는 이 시사지는 

통상 중도에서 중도좌파 정도의 시각을 담은 매체로 분류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정당 중에서는 사민당(SPD)의 입장과 비견할 만한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디 자이트지는 진영을 넘어 정론지라는 권위를 누립니다. 

어떠한 입장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기 위해서는 반대 입장을 반박해야 할 텐데,

이때 논박하기 쉬운 '허수아비'를 억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상대하기 힘든 빼어난 상대를 토론의 파트너로 택해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이러한 논증 방식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통해 정론은 정론이 됩니다. 

공론장에서 펼쳐지는 '호적수'와의 논쟁이 정론을 정론으로 만듭니다.


물론 보수진영에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FAZ)와 같은 정론지가 버티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보수주의로서의 뚜렷한 정파성을 지녔지만 

정론지로서 독일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좋은 적수라는 뜻의 '호적수'라는 말은 어쩌면 좀 낡은 표현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호적수라는 말이 어색해진 현실에는

웬만하면 다 비슷하기를 기대하며 

빠른 합의를 강요하고

쉬운 논쟁을 선호하며

차이나는 입장 간의 생산적 경쟁을 기피해 온 

우리 사회의 단면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반면 '논객’이라는 말이 우스워진 현실도 있군요.

여기에는 진정한 내용적 차이보다는 

마치 누가 더 선정적인 표현을 더 빨리 생각했는가의 경쟁이

정치적 논쟁인양 후퇴해버린 

정치문화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제 도입 같은 제도적 변화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문화와 의식의 변화입니다.

제도가 바로 문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제도들이 해외로부터 소개되고 도입되어도 

실현 과정 과정에서는 제도에 담긴 가치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가치 간의 우선순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소통과 합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어도 그 취지는 

과거의 가치와 습관을 고집하는 정치 문화 속에서 쉽게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 문화는 좋건 나쁘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합니다. 


정치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변수입니다.

그것은 특히 선거나 국가적 위기와 같은 특별한 집단적 경험과 기억 형성을 거치며 

질적 변화를 도약적으로 이루어내기도 합니다. 


연동형 비례제와 내각제, 논쟁과 협치의 문화의 모범으로

독일 사례가 종종 인용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분단과 냉전 속에 탄생한 서독 사회는 

일반적 인식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진영논리와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독일제국의 발호를 염려하던 승전국이 이식해 놓은 민주주의 제도에서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태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민들이 남남갈등 이상으로 극심했던 '서서 갈등'의 폐해를 직시하지 못했다면 

현재 독일의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일이든 다른 어느 나라이든 
민주주의 문화는 시민들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아이, 청소년, 중장년층, 그리고 노년세대가 모두 함께 

갈등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소화할 능력,

즉 갈등 능력을 키우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라는 현실입니다. 


생산적 경쟁의 정치 문화는 

생산적 경쟁이 공동체에 더 많은 가치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경험의 기억이 축적될 때에 비로소 만들어집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 진지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정론지들을 매일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그이들에게도 정론지의 가격과 두께는 부담스럽습니다.

정론지가 황색 타블로이드지처럼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론지는 독일 사회의 공론장에서 훨씬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그 말과 글은 라디오와 공영방송을 통해 거듭 인용되고 정치인과 일반인들의 대화 소재로 활용됩니다. 

정론을 펼치는 언론인들은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무수한 공론의 장에 최고의 전문가로 초대받습니다.

다원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른 정치적 입장 간의 생산적 경쟁입니다.

그를 위해 언론과 미디어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스스로 '정론지'라고 말한다고 해도 

단순히 편향적인 차원을 넘어 누구보다 더 선정적일 수 있습니다.

또 뉴미디어라고 분류된 

아니 더 넓게 잡아 온라인이라는 이유로 시작부터 열외된 채널을 통해서도

오히려 더욱 깊이 있는 사회적 의제의 공유와 토론이 가능함을 우리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화제가 되었던 유튜브 삼프로(“삼프로TV 경제의 신과 함께“)의 경우도 좋은 사례입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라는 형식의 차이는 물론 있겠으나,

결국은 어떤 매체이든 결국 누가 앞서의 '정론'을 얘기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시대라지만

결국 터치스크린 앞에서는 포털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선정적이지 않기에 '정론'이라고 불리는 생각이 

어떻게 더 많은 이들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답하기 어렵지만 더욱 중요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선거 이후에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더 좋은 정치 문화에 대한 고민도 꾸준히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장 (Dr. Yhee, Jean, Institut Politik+Kultur)




p.s.1.

선거 풍경을 도배하다시피 한 이미지 정치와 인신공격 속에서도

사회적 의제를 차분하게 다룬 좋은 기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일부에 불과하지만 몇 개를 추려보았습니다. 

다른 좋은 기사와 기고문이 있다면 아래 댓글로 공유해주셔도 참 좋겠습니다. 


연합뉴스:

[이광빈의 플랫폼S] 뜨겁던'홍천 민둥산' 공방전 잠재운'과학의 힘'

 https://www.yna.co.kr/view/AKR20220228154000530?section=opinion%2Fjournalist%2Fcolumn11&fbclid=IwAR1KHVKCdtdlCJZLW5upod1KdJ9CDR5lg3O6KKO5pUAAHPtgybG8mSeEh1A


한겨레: 

2022 대선 정책 가이드

https://drive.google.com/file/d/1Et_F5m8q9c4x0wcJv46FVa0KXm5FH4e4/view?fbclid=IwAR1g3gP6tsqaOuOGZqg8d2-vGegV2z4KeS-jLuCJ6na5DwIOvbLyOedavn0


경향:

2022 대선 공약 탐구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j192


경향신문 X 섀도우캐비닛 무가당 프로젝트"우리가 당이 없지 표가 없냐"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329


한국기자협회:

네거티브 속 단비 '유권자 참여형 정책 보도'

http://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1037&fbclid=IwAR0IMGTGX7BrWaxwPK7FrtAcGlaQVpIcIWp5Iezle-xgUY8En8IX-3QrM8s)



p.s.2. 저는 작년 한겨레 지면을 통해 독일 총선을 시작부터 끝까지 살펴보았었습니다. 베어복 당시 녹색당 총리 후보의 논문 표절 시비가 잠시 있었다고는 해도, 독일의 공론장에서는 무엇보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 위기 때문에 더욱 달성해야 할 사회적 전환이라는 의제가 중심에 놓였었다고 평가합니다. 청년을 수혜자로 가정하고 정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청년 정치가 아니라, 청년 아니 청소년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정당활동을 시작해 지역정치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결국 총리가 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청년 정치입니다.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링크: 1 2 3 4 5 6 7 8 9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 함께 연대한 베를린 동네 주민들 (<힙 베를린. 갈등의역설>,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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