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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Jun 14. 2020

남의 고통에 둔감해야 평범한 삶이 가능한가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② - 구원과 자비심

독일어에는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평범한 일상인이 스스럼없이 유대인의 학살 결정문에 도장을 찍었던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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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목차
 1. 삶 즉 고통 (링크)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링크)

  



 2. 구원
 
 (1) 
수난(Leiden, Passion)

앞 글에서 "이 삶의 고통 자체는 하지만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라고 적었기는 하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왜 예술과 문화 속에서 굳이 수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좌: 기독교적 수난의 영화화 / 우: 수난은 문화적 행위로 일상에 스며들기도 한다(독일 슈트트가르트 지역의 수난극 행렬)


이와 같이 인류가, 아니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치유는 응당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암포르타스도 쿤드리도 클링조어도, 이 모든 이들이 진정 원한 것은 모두 단 한 가지, '구원'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모두가 이겨내지 못할 고통 속에 있다면 과연 어떤 누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양 기꺼이 혹은 감히 다른 누군가에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이러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파르지팔>에서 왜 하필 '순수한 바보'만이 구원자의 자격을 지닌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앞서 '모든 자가 고통받고 있다'라고 적고는 '파르지팔'이란 인물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쳤던 것에 대한 해명도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논의의 속도를 늦춰 보아도 좋을까? 이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의 문제는 우선 구원해야 할 고통이 어떤 원인에서 나온다고 보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파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그의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본 <파르지팔>에서 바그너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음은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제한없이 받아 들인 것은 아님을 감안해도) 명백하다.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접하기 전이었던 <탄호이저>에서조차 발견되는 두 인물의 사상적 친화성은 놀라울 정도다. 

 바그너의 예술만큼이나 매혹적인 쇼펜하우어의 사상인데다, 거기에 니체와 헤겔을 함께 초대하면 더욱더 흥미로울 듯하다. 하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에 논의를 한정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는 극중의 계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상처(Wunde)' '고통(Schmerz)' '괴로움(Weh)' '고난(Not)' '수난(Leid)' 과 같은 말들을 당연한 개념인양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했다. 이것이 사실 큰 문제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꼭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중 '수난Leid'이라는 말의 특수성이다. 이 단어를 동사(leiden)로 바꿔보면 "(괴로운/부정적인/피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감수하다, 견디다, 앓다, 그것으로 고통받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괴로움'은 '고난'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함으로써만 그것은 존재한다. '고통'이나 '괴로움' 과 같은 말로 지칭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흔히 '감정'이라는 근원적인 현상에게 부당하게 부여되는) 어떤 찰나적인, 스쳐 지나가는 심적 상태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고통받다leiden'라는 것은 단단한 현실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수동적/피동적인 위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인간에 있어 '경험하다' 혹은 '살다'라는 말의 다른 얼굴이다.
 
서양철학의 한 조류에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세상에 내던져졌다(geworfen)'다고 말하는 것도 <파르지팔>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귀담아 들어볼 만 하다. 일상적인 숙고로도 이 점은 자명해 보이는데,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자신의 좋고 싫음에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시대와 장소, 사회제도와 가족관계라는 망망대해 속에 조각배처럼 떠다니는 개인에게 닥쳐오는 (최소한 유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눈에는) 우발적인 사건들의 파도! 그 속에서 인간은 출발점에서부터 "- 되(어지)다"라고 일컬어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가 문제로 삼는 고통은 엄격히 말해 삶 자체를 말하며,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곧 삶 자체로부터의 구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수난(passion과 passive라는 두 단어를 비교해보라) 그리고 열반 직전 부처가 겪는 시련을 포함, 많은 종교적 진리의 완성은 스스로 고행을 택하든 남에 의해 박해를 받건 언제나 고난을 수반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만 하다.
 
<파르지팔>의 부제(Bühnen Weihefestspiel)는 무대신성제전극(舞臺神聖祭典劇), 신성무대축전극(舞臺神聖祭典劇)과 같이 때로는 거창하게 혹은 '무대 봉헌극'처럼 간결하게 번역되는데, '공연을 통해 (새로 열리는) 극장/무대를 신성하게 만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독일에서 '집들이'는 약간은 농을 섞어 Einweihungsparty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 부제에서부터 예술을 통해 종교를 구원한다는 바그너의 이상이 담긴 본 작품에서 삶 즉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어떤 통과의례, 곧 삶(=고통)을 거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보았던 종교적 원형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 혹은 뻔뻔한 역설이 아닌가?  아직 필자의 길고 난삽한 문장에 현혹되지 않은 이라면 바로 되물을 것이다.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 끝에 고통스러운 삶을 선물로 받은 격이 아닌가??
 
그렇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고통으로 깨달을지니(durch Leid wissend)"라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고통으로 믿으리니(durch Leid glaubend)"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부적절했으리라.
 
 
(2) 자비(Mitleid) 보살행(mit-leiden)
 
자비(慈悲)와 보살행(菩薩行)이라니?! 비둘기, 빵과 포도주(=피), 성배와 성창이라는 기독교적 상징들이 난무하는 <파르지팔>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불교용어를 써도 되는 것인가? 


(좌) 지장보살도: 불교적 세계관에서 아미타불이 고통없는 극락에 있다면, 지장보살은 고통의 현장 한 가운데에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한다 / (우)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


관련하여, 불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파르지팔>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들 그리고 <파르지팔>로 표현하려던 바가 전달 되었다고 보고 중단된 바그너의 불교적 우화 <승리자들 die Sieger>에 대한 이야기 등은 <파르지팔>에 대한 이야기의 보고, 몬살바트 사이트에서 풍부하게 담겨 있기에 부연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오페라연출자 하리 쿠퍼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남긴 흥미로운 코멘트를 소개한다.( * 동독 출신 연출자 하리 쿠퍼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룬다) "만일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분명 '자비심(필자주: 역시 Mitleid. 여기에선 '박애'나 '동정심'이 적절할까?)과 믿음'이라고 말했을 것이지, 결코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리 쿠퍼가 지적했던 것처럼, 기독교와 불교는 자비심, 연민, 박애, 동정으로 일컬어지는 가치의 상당부분을 공유한다. 하지만 '깨달음(Erkenntnis, 인식)'이 불교에서 누리는 지위가 특별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불교에서의 구원은 무엇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 즉 자기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음 없는 자기 구원이란 가능하지 않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짧은 글에서 깊이있는 종교적 논의를 시도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기독교적 전통 혹은 클리쉐에 심취하기도 했던 한 서구인 바그너의 작품에서 불교적 구원이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여기에서는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파르지팔'이란 인물이 걸어가게 될 길,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적혀있는 그 고난과 방랑의 행적이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는 우리의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야 간신히 글의 처음에서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마주 볼 수 있을 듯 싶다.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본다면 2막과 3막 사이의 대본으로 기록되지 않은 세월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자비심(Mit-leid)이라는 말에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 동정(Com-passion), 또 공감(Mit-gefühl, Sym-pathy)이 그들이다. 연민이나 박애도 빼놓지 말자. 이들이 뜻하는 것은 어원적으로도 내가 아닌 남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번 저 계시를 막막한 심정으로 음미해 본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 그런데 어떻게 느낀다는 것을 통해  수 있을까?!
 
만일 느낌을 주관적인 감정 혹은 미적인 영역에, 앎을 객관적인 참의 영역에 각각 분리시킨다면 두 영역간의 이러한 이행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두 영역간에 이행이 가능하다면, 즉 "자비심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느낌도 앎도 '삶'이라는 것, 산다는 것, 체험하는 것의 다른 이름들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인문학적으로 짚어가면 미학에서는 예술론과 감성학의 관계, 그리고 미학과 인식론 및 윤리학의 공통분모를 찾는 문제로 연결되리리라.)
 
그렇게 보면 단순히 '경험한다/겪는다'는 것이 반드시 '느낀다'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삶을 산다는 것의 본질이 고통받는 것이라면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자, 괴로워하는 자는 보다 구원을 향해 한걸음 앞에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의 주요인물들은 질식할 것 같은 경건함으로(1막의 성배기사) 혹은 욕망에의 탐닉 속에서(2막의 '꽃')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군중들에 대비된다. 파르지팔의 말을 빌리자면 "네 수난은 복되도다 (Gesegnet sei dein Leiden)"(3막).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자 중 왜 '순수한/순전한 바보(der reine Tor)' 파르지팔만이 구세주의 자격을 부여받는가? 
 
그 첫번째의 대답을 '모르는 자만이 새롭게 알 수 있다'라고 시작하면 너무 무모한가? 
 
우선 '바보'라는 말에는 누구나 당연히 '아는' 것들을 모르는 자에 대한 '아는 자'들의 비난이 담겨있다. '순수한' 이라는 멋진 수식어는 '바보'라는 말에 붙어 "너 진짜 바보 멍텅구리로구나! du bist aber ein reiner Tor!" 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명제를 만든다.
 
 GURNEMANZ 구르네만츠
 Was stehst du noch da? 너는 아직도 뭔가 하고 있는거냐?
 Weisst du, was du sahst? 너는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나 하느냐? 
 (Parsifal fasst sich krampfhaft am Herzen und schüttelt dann ein wenig mit dem Haupte) (파르지팔은 경련이 난 것처럼 심장 언저리를 쥐어짜더니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Du bist doch eben nur ein Tor! 아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두번째로, 자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leiden) 자와 남의 고통까지 함께 괴로워하는(Mit-leid) 자의 차이를 숙고해 볼만 하다.
 
앞서 보았듯 개인에 있어 고통이 하나의 실체적 경험인 것처럼 자비심(Mit-leid)도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에 적선하듯 떠올리는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선 다른 이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앎'이다. 사실 고통받는 이들처럼 어떻게 우리가 느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을 인식의 문제로 파악한다면 새로운 논의가 가능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말하듯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좌) 책상 살인자, 아돌프 아이히만 / (우) 아이히만이 '출근'했던 베를린 소재 한 건물 앞. (독일의 '기억 문화'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이 이어질 예정)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평범한 일상인이 스스럼없이 유대인의 학살 결정문에 도장을 찍었던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그렇다면 우선 파르지팔은 더욱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파르지팔이 자만하거나 쿤드리를 하찮고 부정한 여인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파르지팔은 자신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하는 비참한 자임을 깨달았기에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뭇 사람의 눈에는 천해 보이던 여인의 발을 씻어주던 예수를 떠올려보라.) 따라서 이 유혹에 빠질 때 저주를 받는 것은 쿤드리 만은 아니다.
 
 PARSIFAL 파르지팔
 Auf Ewigkeit 영원히
 wärst du verdammt mit mir 너는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 
 für eine Stunde 단 한 시간 동안이라도
 Vergessens meiner Sendung 내 소명을 잊은 채
 in deines Arms Umfangen! 네 품에 나를 맡긴다면


만일 <파르지팔>에 2.5막이 있었다면, 연출가들은 아마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파르지팔의 수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막중한 과제는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될 것이다. 피곤에 찌들어 귀가하는 일상인의 모습도 좋을 테고 영문을 모르고 전쟁에 끌려왔던 병사의 귀향을 그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켜졌으면 하는 것은 3막에서 파르지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일체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이어야한다는 점이다. 그는 암포르타스와 쿤드리, 그리고 클링조어에 못지 않은 절망을 그 심연까지 스스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파르지팔은 그 심연에서 나의 비참함이 너의 비참함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이러한 점에서, 극의 마지막에서 파르지팔이 성배의 덮개를 벗기고 성 밖의 세계로 나아가게끔 형상화한 쿠퍼의 연출은 보살행으로서의 파르지팔의 행로를 훌륭하게 마무리한 예가 아닌가 한다. 
 
 
다시 적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을 그리고 <파르지팔>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삶과 세상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논의가 종교나 특정 학문의 틀을 넘어선다고 해서 구태여 그 이야기를 가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출세간(出世間)이 곧 입세간(入世間)이다. 도를 깨쳤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세간을 떠나서 별천지에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곳에 옮겨와 보면 이제까지의 논의에 딱 들어맞지만 이 인용은 하이데거를 해설하는 어느 원로철학자의 말이다. 키에슬로브스키의 "세가지 색" 연작을 마무리하는 영화, '박애'의 색깔 <빨강 Rouge>을 오랜만에 다시 틀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계속) 


3편으로 이루어진 "파르지팔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연재 글은 

모두 2005년에 작성했던 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당시 사용했던 표현 일부를 고치며, 약간의 내용과 사진을 추가하였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오래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찾아 읽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표현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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