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딸이지요?”
시어머니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행지에서도, 같이 손잡고 간 시장에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어머! 여태껏 딸 인줄 알았어요!”
주간보호센터 선생님도 어머니가 센터에 다닌 지 한참이 지나서 하던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고부가 아닌 모녀 사이로 본다.
누구와도 금방 친밀감 있게 대하는 나의 성격 때문일까? 결혼 전에 양가 부모님들 상견례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나는 처음 만난 시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며 앞장서서 걸었다. 친정 부모님이 뒤에 따라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그날 밤 엄마가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보기는 좋은데 어째 이제 딸을 뺏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랬다. 그때부터 우리 고부는 늘 손잡고 다니고, 팔짱 끼고 여행가고, 팔베개를 하고 자는 모녀 같은 고부간이 되었다.
두 엄마는 36년생 쥐띠로 동갑이다. 시어머니(이후로는 어머니)는 2013년에 이미 치매가 눈에 띄게 드러났지만, 아버님이 옆에서 돌봐줄 수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2015년 80세였던 친정엄마(이후로는 엄마)는 진드기에게 물려 쓰쓰가무시라는 병으로 거의 한 달여를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고 6살 아이의 인지능력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입원 후유증으로 치매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진행 속도도 아주 빨랐다. 한편 어머니의 치매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진행되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오게 된 2020년 이전까지는 시아버님(이후는 아버님)이 요양 보호사의 도움과 함께 어머니를 돌보셨다. 내가 전적으로 어머니의 병구완을 시작할 즈음 어머니의 치매는 거의 말기에 이르러 내가 며느리인지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대소변까지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거의 1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양쪽 가족은 치매 엄마들로 인하여 살얼음을 걷는 초조함과 불안을 겪었다.
치매라는 것이 그저 기억을 잃어가는 병 내지는 벽에 똥칠하는 병쯤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너무나 무지했다. 치매가 어떤 증상을 보이며 치매환자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엄마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은 나날들을 감수해야만 했다. 갈등과 분노로 인해 엄마도 나도 행복하지 않은 날들을 수없이 보내야 했다. 엄마의 인지능력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의식주만 해결해주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인지를 좋아지게 하는 교육이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와 힘든 날들을 보내다 결국 엄마를 요양병원에 보내게 되었다.
엄마를 요양병원에 보낸 후, 치매의 끝자락에 있는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온 것은 가족이 나에게 부담을 주어서가 아니다. 노부모를 모시는 것은 자식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순리인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고 모질게 했던 일들이 생각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 미안함을 만회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왜 내가 모셔 왔을까?’ 하며 순간순간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기억 한 편에 자식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오히려 뿌듯하기도 했다.
나쁜일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합가를 하고 2년 3개월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부모님을 모셔 오자마자 한달도 안되어 아버님은 폐암 말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을 모시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남편마저 전립선암 2기진단을 받아 수술까지 해야했다. 부모님은 그 기간동안 요양병원에 잠시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서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다. 아버님이 계시지 않은 병실에 혼자 외로울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와 9개월을 더 간병을 하게 되었다. 이미 치매중증환자인지라 배변문제로 너무 지치다 보니 4개월 전에 어머니를 다시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더 모셔야 하는데 요양원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금도 죄책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한다.
두 엄마들을 간호하면서 혼자 울며 지낸 날이 참 많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어디 가서 하소연하거나 위로받고 싶어도,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일로 바빠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줄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치매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면 주로 전문가가 전해주는 치매 예방을 위한 방법들, 치매 증상연구, 치매 사례 등에 관한 자료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하지만, 간병인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공감해주는 내용은 드물었다.
치매 환자와 몸을 부대끼며 같이 살지 않는다면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치매 환자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상상도 못 한다. 아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얘기할 때 공감하기도 힘들다. 때로는 문제를 애써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가족이 하나로 뭉쳐야만 이겨낼 힘이 생긴다.
나는 이글을 치매 환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주 간병인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이해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한 가정이 행복해지려면 엄마가 가장 행복해야 하듯, 치매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주 간병인이 가장 행복해야 한다. 심신이 건강한 간병인이 환자를 더 잘 돌볼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 중에서도 치매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걸 알기에, 돌봄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버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치매를 앓는 엄마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지막 순간이 어떠할지에 대한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이 삶에서 너희 덕분에 행복했다"는 고마운 말을 듣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자, 치매로 고통 받는 엄마들을 끝까지 집에서 돌보며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했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무게 앞에서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셔야만 했다. 이 선택이 가져온 마음의 무게와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유교문화가 저변에 깔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등 시설로 부모님을 보내는 것을 불효라는 등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설에 부모님을 보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희생하고 고생한 주 간병인의 노고를 뭉개버리는 실수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치매를 앓는 두 엄마를 모신 시간은 외롭고 힘들어서 다시는 돌아보기 싫을 만큼 지치고 아팠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힐링이 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쓴다. 치매 부모님을 또는 치매 배우자를 돌보며 깜깜한 동굴 속에서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인내하며 병간호에 희생했거나 보냈거나 현재 진행 중인 간병인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참 수고했다고, 그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라고, 이제부터는 본인도 돌보는 시간을 보내라고 따뜻한 위로와 포옹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