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라이퍼의 정착, 그 이후
자다가 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아직 새벽 6시. 오늘은 좀 시원하겠군, 하며 다시 잠 드려다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밖으로 나가 지붕 위에 올려둔 신발을 밴 안으로 넣고, 밖에 걸어둔 손수건을 걷고, 진흙으로 만든 땅속 냉장고 뚜껑 위를 우산으로 덮고, 불 피우려고 모아둔 잔가지들을 밴 밑으로 집어넣었다. 밴 안으로 들어와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차, 창문을 열어뒀었지. 한밤중에 내린 비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잠귀가 어두운 편이어서, 하마터면 신발이며 손수건이며 다 젖고 창문으로 치고 들어온 빗물에 이불마저 젖을 뻔했다.
일어난 김에 메일이나 확인하려고 했는데 인터넷이 잘되지 않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인터넷이 잘 안된다. 평소에도 3G가 잡히는 장소가 따로 있고(주로 밴 지붕 위), 동영상을 보려면 밴 문을 열어둔 채 최대한 바깥쪽으로 태블릿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문을 닫은 저녁엔 인터넷으로 별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
일기예보를 거의 매일 확인하는 이유는 인터넷 때문이기도 하다. 폭우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있으면, 미리미리 메일 답장을 보내고 중요한 연락이 올 데가 있으면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비바람 치는 날은 강제 주말이 되는 셈이다. 텃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동안 밴 안에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땅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밴 라이프 패턴을 상당히 바꿔 놓았다. 하루 일과의 절반 가까이가 이동 준비를 하고, 이동하고, 이동 후 정리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동하지 않는 날에도 비가 올 때면 할 일이 꽤 많았다. 빨래를 밴 안으로 들여 적당한 자리에 말리고, 태양열 충전이 되지 않을 테니 미리 기기들을 충전해두고, 밴을 세워둔 장소가 젖으면 바퀴가 빠질 우려가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등의 일이다. 정확히 몇 시가 되면 밴 위로 나무 그늘이 지는지를 알고, 비가 와도 빨래가 많이 젖지 않는 큰 나무 아래에 항상 빨랫줄이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작은 화덕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한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얻은 대신 새로움과 우연적 만남은 줄었다. 더 이상 매일 아침 열어젖힌 밴 문 바깥의 풍경이 달라지진 않는다. 불쾌한 만남이나 불편한 장소를 만날 가능성은 줄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사람과 장소를 마주칠 가능성도 줄어든 것이다. 아쉽다기보다는 그저 새롭다. 어느새 다른 하루를 보내는 우리가, 그럼에도 여전히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우리가 신기할 뿐이다. 어디서든 쉽게 적응하고 욕심 없이 만족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