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COCO Nov 01. 2023

전청조가 창조한 세상

자기 확언은 전청조처럼. I am 신뢰예요.


연예인의 마약 뉴스? 그다지 관심거리도 아니다.

대규모 전세사기부터 연이은 길거리 묻지 마 살인, 옆 나라에서는 핵 폐기물을 바다에 방류,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치솟는 물가, 더 인상된다는 기준금리.

이런 암울한 고담시티에서 연예인이 약을 빨든 뭘 빨든 알 바 아니다.

나도 뭐라도 빨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런데 이건 좀 다른 뉴스다.

재벌 3세와 결혼 발표를 한 전 펜싱 국가대표의 자랑, 아니 인터뷰 기사.

누가 보나, 있기는 했나 싶은 <여성조선>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에

여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어이없는 의혹들이 이어졌다.


예비 신랑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고?

재벌이 아니라고?

뉴욕 출신이 아니고 강화도라고?

결혼을 했었다고?

남자랑 결혼한 적도 있고 여자랑 결혼한 적도 있다고?

남현희는 자기가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성관계를 했다고?

아니… 어떤 식으로 했길래 그걸 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남현희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어느 날 펜싱 아카데미를 찾아온 20대 후반의 어린 여자. 꽤 돈이 많은 것 같다. 주변에 돈 많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니 어느 정도 그런 사람들에 익숙하다. 그런데 얘는 뭔가 좀 다르다. 경호원? 일론 머스크? 파라다이스 혼외자? 사기꾼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런데 돈을 쓰는 수준이 범상치 않다. 혹시 사실인 걸까?


그리고 어느 날.


사랑해요


날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내가 가진 모든 고민을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그렇게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과

이건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는 차가운 이성이

매일 밤 자려고 눈을 감으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잭팟이지.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만약 거짓이라면….. 뭐 거짓이라도 일단 지금은 나에게 잘해주고 있으니까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없잖아.

나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될 거야. 어차피 난 가진 것도 없으니까 나한테 사기 쳐봐야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렇게 남현희는 피를 토하며 시한부의 삶을 사는 재벌 3세 혼외자인 여자지만 어쩌면 남자인 사실은 어찌 되었든

전청조의 벤틀리 조공을 허락한다. 그 어떤 막장 대박 작가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기의 대환장 로맨스 스캠의 ‘여자 주인공’ 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 2’가 될 것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혼하고 나서 적어도 6개월 동안은 이성을 만나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 정서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후회할 만큼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남현희도 그랬을까. 이혼을 결심할 만큼 남편과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을 때 나타난 여자인지 남자인지 뭐든 간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전청조에게 평소라면 그럴 리 없었을 만큼 마음을 의지하고 말았을까.







남현희가 공모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남현희가 전청조의 사기 행각을 알고도 방임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보호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이 깨지 않도록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정보와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작고 완벽한 동화 속 공주님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펜싱 은메달리스트라는 남다른 유명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뿐

나나 당신과 다름없는 평범하고 남루한 도덕관과 허영심, 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재벌 3세와 결혼하는 동화 속 공주님 같은 나‘를 믿고 싶은

아주 연약하고, 때로 사악하고, 추하고, 불쾌하고, 섬뜩하고 기괴한 내밀한 욕망을 고루 갖춘 평범한 사람이다.





언제나 우리를 노리고 있는 사기  




사기꾼이 마음먹고 작업을 하면 넘어가지 않기 어렵다고 한다.


아마 사기꾼들은 사기에 잘 넘어가는 부류를 감별하는 작업을 가장 먼저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


원하는 것을 쉽게 얻고자 하는 사람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500만 원을 5억으로 돌려주겠다는 말에 현혹되는 사람들.

나에게만 주는 투자 기회라는 말에 당연한 절차들을 무시한 채 덥석 돈을 이체한 사람들.

.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당신은 나에게 특별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싶은 사람들.

당신이 좋다고, 예쁘다고, 멋지다고 말하는 낯선 사람을 믿고 싶은 사람들.


 

욕망과 외로움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고 유혹에 흔들리게 한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욕망 앞에 매번 무너지는 나약한 의지를 가졌음을.

외로웠던 날 그 누군가의 손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어리석은 순간을 떠올리며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피해자에게 왜 그리 어리석었냐고, 너무 채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확언의 천상계, I am 신뢰예요



그리고 전청조는 국가차원에서 양성해서 국제 협상 특수요원으로 키우면 어떨까 싶다. 언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국제분쟁해결기구 같은 곳에 보내면 어떨까. 애가 상당히 잘못된 방향으로 트인 건 확실한데 일단 대범함이나 실행력 같은 부분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정도면 역행자 중에 역행자가 아닌가. 자기 암시의 끝, 확언의 끝에는 이런 인물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 싶다. 단지 사기꾼, 이라고 넘어가기에는 놀라운 부분이 너무 많은 한 젊은 여자의 인생. 그녀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교화하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교복을 입고 또박또박 대답을 하던 안경 쓴 여중생 아이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고 무엇을 듣고 보고 자라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사기 혐의로 수배 중인 아버지, 그의 어린 딸은 자라서 아버지와 같은 사기 범죄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가르쳤을까.








이제 전청조가 구속되고 여러 가지 진실 공방들이 펼쳐질 것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올지 어떨지 기대하면서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피해를

이렇게 넷플릭스 시리즈 기다리듯 가볍게 여기는 것에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부디 피해자들에게 너무 큰 불행이 아니기를.












작가의 이전글 사랑에 대한 서늘한 이야기, 영화 <박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