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이 되지 못한 이들의 사랑 이야기
박찬욱 감독에게 어떤 인터뷰 중에 물었다.
필모그래피에 단 하나의 작품만 넣을 수 있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하겠는가.
박찬욱 감독은 <박쥐>를 꼽았다.
<아가씨>가 그의 업의 정점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박쥐>라니 궁금해졌다. 오래전에 분명 보았지만 남아있는 기억은
어딘지 어색하고 과장되어 있던 송강호와 김옥빈의 연기 정도였다.
대부분의 스토리며 장면이 새로웠다. 아마 그때 이 영화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지 못했을 것 같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박쥐>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집중해서 즐겁게 봤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바로 다음 날 내가 혹시 놓친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한번 더 봤을 정도다.
동정을 맹세한 신부님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사제가 신과의 맹세를 저버리면서까지 빠져든 사랑의 대상은 천하고 비참한 여자다. 자신의 마음을 이용하고 배반하고 마침내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어리석은 그녀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지옥까지 손수 데려가는 사랑을 한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수 없다.
운명의 길목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그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성은 힘을 잃고 저항해 봐야 괴로움만 커져간다.
선악의 기준을 가진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벌하는 죄인은 과연 누구인가.
죄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영화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려져 동네 똥개처럼 밥도 주고 매도 주는 이웃에게 주워다 길러진 여자, 태주. 그녀의 경험과 생각, 감정, 그렇게 완성된 현재의 태주는 누구의 책임일까.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안전하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 그것이 김옥빈, 여자 주인공 태주다.
그리고 여기, 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소명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을 헌신한 신부가 있다.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자신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는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괴물이 된다. 사람의 피를 마셔야지만 살 수 있는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 산자의 신선한 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든 억누르며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살아남기로 타협한 신부. 그는 한 여자를 만난다. 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보다 참기 힘든 것은 성욕이었다. 사제는 친구의 아내 앞에서 신과의 맹세를 저버린다. 여자의 몸을 탐하고 사정의 욕망에 헐떡이게 한 그의 첫사랑이 시작된다.
거지 같은 집에서 병신 같은 남편과 살고 있는 여자, 태주는 현실이 지옥이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밤마다 맨발로 거리를 달린다. 하지만 갈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낮에는 시대와 한참 거리가 먼 한복점에서 마네킨처럼 화장을 하고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앉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린다. 밤에는 병신 남편과 시어머니를 수발하고 음탕한 눈빛을 숨기지 않는 무례한 이웃들까지 더해진 거지 같은 시간을 견딘다. 그러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 되면 지옥 같은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잠옷 차림에 맨발로 아무도 없는 거리를 심장이 터지도록 달린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친절했던 남자. 길바닥에 넘어져 몸을 훔쳐보지 않고 오직 선의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얇은 잠옷 아래 드러난 그녀의 거친 맨 발에 자신의 신발을 벗어 신겨준 사람.
태주는 신부에게 새 구두를 선물한다. 그녀 앞에서 애써 억누른 육체의 욕망과 싸우며 쇠 자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는 신부님을 본다. 그는 욕망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참는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신을 섬기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것을 죽을힘을 다해 거부한다. 그녀가 익숙한 것은 남자들의 끈적한 눈빛, 은근하고 때로 노골적인 손길, 뻔하고 지긋지긋한 그 개수작의 사파리에 등장한 순결한 천사. 태주는 순진하고 측은한 노총각을 위해 속옷을 벗고 순결한 천사의 몸 위에 올라탄다.
하지만 신부는 달랐을 것이다. 한 번도 여자와 닿지 않은 몸을 간직했던 남자는 그 순간, 불덩이처럼 뜨거운 그 모든 순간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랑해야만 했을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던 헌신의 약속을 깨고 여자와 몸을 섞고 동물처럼 신음하고 자신의 모든 도덕적 가치를 배반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첫사랑이며 마지막 사랑인 그녀와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요 부끄러움 타는 사람이 아니에요”
신부와 처음 육체적인 관계를 맺던 날, 태주는 몇 번인가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가린다.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시간들을 견디면서 스스로 되뇐 주문 같은 말.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몸짓과 다른 말을 하는 태주. 안쓰러운 여자다.
그녀는 피를 마시는 신부를 보고 기겁을 해 도망을 간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복점에서 지루함의 지옥에서 반쯤 미친 여자 같은 눈빛과 목소리로 신부에게 전화를 건다. “나도 뱀파이어로 만들어주면 안돼요?” 라며 까르르 웃는다. 인간으로 살 수 있는 현실이 이것뿐이라면 사람의 피를 마시면서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태주. 그것이 해방이라면 그렇게라도. 죽어있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이제 괴물이든 뱀파이어든 아무것도 상관없는 태주.
500원짜리 동전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고 건물 사이를 붕붕 날아다니는 뱀파이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녀는 행복하다. 아니 인간이 아니기에 더 우월한 존재이기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에 두려움보다 환희를 느낀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이란 얼마나 뻔한가. 그 애정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하지만 죄책감이라는 균열이 둘 사이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판타지 같은 그들의 사랑에도 금이 간다.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손에 묻은 피에 대한 죄의식은 신부도 태주도 견디기 힘든 것이다. 편안한 잠을 빼앗기고 환영에 시달리고 결국 서로를 원망하며 상처를 준다. 폭주하는 태주를 보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신부는 속죄를 결심한다.
태주와 신부님의 사랑 이야기는 어릴 적 동화책 속의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해피앤딩을 맞지 못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상상은 실은 순진한 신부님의 것이었다.
태주에게 그런 바람 따위는 없다. 살아있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마지막 생의 시간은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 남녀의 사랑이 대체로 얼마나 시시하고 힘이 없는지 모를 리 없는 그녀는 더 오래 누리고 싶다는 욕심은 내지 않는다.
2023년 서울
한 여자가 있다. 평범한 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다니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자.
어떤 것도 어떤 날도 기대되지 않는 권태로운 시간의 고문을 견디는 삶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뱀파이어다. 무섭고 이상하고 끔찍한 존재다. 누군가의 피를 먹고사는 존재.
그럼에도 이번에도 그녀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고 외로운 우리는
사랑이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파멸의 고통까지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그를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