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고 싶은 하루가 있나요? 그 하루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큰 솥 내.
한 박도 쉬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와 주방 쪽으로 향합니다.
아셨구나.
쭈빗거리다 솥을 꺼냈어요. 소고기 한 덩어리를 솥에 넣습니다. 타다다닥. 가스렌지에 불이 붙고. 이번엔 미역. 쏴아아. 볼에 물이 담기고, 미역을 불립니다. 평소보다 행동 마디마디가 끊어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가서 누워.
낮잠 자는 작은 아이 옆에 누웠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한 달 내내 내가 했던 일을 엄마가 내 주방에서 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밥을 짓는 것. 마음도 같겠지요. 기도와 밥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밥 먹어.
한 시간 조금 넘었나. 미역국 한 그릇에 흰 밥. 그리고 김치.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넘겼습니다. 식도로 넘어가는 뜨거운 국물. 맛이 느껴집니다. 한 달 동안 뭘 먹었었나. 기억에 없어요. 물을 먹고, 김치를 조금 먹고, 밥을 한 수저 먹고. 그런데 이 미역국. 맛이 느껴질 뿐 아니라, 맛있습니다.
너, 엄마야. 정신 차려.
보통 때 같으면 말에 물기가 있을 텐데 단정하게 건조합니다. 엄마 눈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응.
미역국 한 대접, 밥 한 그릇을 다 먹었어요.
간다.
2015년. 큰아이 5살. 작은 아이가 8개월 때였습니다. 낮잠에서 깬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였어요. 엄마가 울면서 나오는 젖은 쓰다는데. 아이는 꿀떡꿀떡 잘도 먹습니다.
그해 봄에 큰아이는 유치원에서 시력검사를 했어요. 장난을 많이 쳐서 제대로 검사가 되지 않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과에 가보라고. 안과를 예약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습관처럼 최악과 최선을 상상해 봅니다. 시력 교정용 안경을 쓸 수 있겠구나. 안경을 쓰게 되면 관리를 어떻게 하나-가 상상해본 최악이었습니다. 시력 교정엔 타이밍이 있으니 서둘렀어요. 아이는 유난히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못합니다.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순차적으로 쪼개 설명하면 곧잘 해내는 아이인데요. 이상합니다. 기본 검사를 간신히 끝내고, 의사와 면담을 했습니다. 다른 검사를 더 해 보기 해야 하지만 ‘황반변성’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망막에 이상이 있고, 시력 발달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자기네는 정밀 검사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요.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병원으로 갔습니다. 안저 검사를 하는데 또 한참 걸렸습니다. 두 번째 의사와의 면담. 젊었어요. 손을 벌벌 떨며. 네. 손을 떨더라고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꺼냅니다. 1000만 명 중 한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이랍니다. 본인은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은 있으나, 직접 환자를 만난 적은 없다고. 소견서를 써줄테니 경험이 많은 자기 은사님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망막층간분리. 안구과 관련된 질병으로, 바깥쪽 그물모양의 층(outer plexiform later)의 망막에 존재하는 감각신경 층이 비정상적으로 분리되는 특징을 가진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X-성염색체 연관 열성유전이며 RS1이라고 불리는 retinoschisin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
유명한 안과와 대학병원 몇 군데를 예약해놓고 속이 타 공개된 국내외 논문자료를 뒤졌습니다. 외국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임상 몇 개가 있을 뿐입니다. 그사이 예약한 병원을 차례로 가보았지만 내가 찾아낸 논문자료 이상의 이야기를 해주는 의사는 없었어요. 진행 중인 임상을 물었으나,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고요.
이제 고작 5살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낌새를 차리고 동생들을 다그쳐 알아내신 모양입니다.
10년.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보다 시력이 나쁘지만,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은 별로 없어요. 잘 안 보이면 가까이 가서 보면 됩니다. 옆 사람에게 물으면 되고요. 핸드폰으로 찍어 확대하면 됩니다. 자라는 동안 익힌 태도에요. 이 태도를 부드럽게, 안전하게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 태도를 익히는 동안 아이를 보며 나도 안절부절하고 싶지 않았고요. 그래서 우리 가정은 <재미난>으로 이주했지요. 처음엔 가장 큰 이유였고, 지금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면 흐릿해진 이유.
얼마 전엔 아이 눈에 다래끼가 났습니다. 많이 부어 시야를 가릴 정도여서 수술을 하니 마니 나는 심각한데,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그래도 다행이야. 생활에 거의 타격이 없어. 어차피 안 보이는 쪽 눈이라.
미역국을 두고 마주 앉았던 엄마와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그날 미역국이 준 슈퍼 울트라 에너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요. 잘 해내고 있다고요.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