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 <Chrysanthemum>에 감명 받은 하루
백수란, 아침에 눈을 떠도 하루 종일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누가 말했나.
아니, 진정 백수는 점심에 눈 떠도 상관 없겠지.
하지만 퇴사하고 백수를 자처한 나는 매일이 바쁘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바쁘다.
두 아이의 학교가 ‘정식’ 개학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흘간 하루 1시간씩 ‘워밍업’ 수업을 했고, 오늘 월요일부터는 시수를 꽉꽉 채운 수업이 개시됐다.
문제는 이번 주 내내 온라인 수업이라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초등학교 2학년인 작은 아이가 영어를 못해 내가 옆에 붙어 동시통역사 겸 보조교사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아침 7시 눈을 뜨고 10분 간 스마트폰 보며 밍기적 댄 다음 욕실로 가 씻었다. 주방으로 가면서 애들 방문을 열고, 기상을 외쳤다. 어제 남은 찬밥으로 계란 김밥을 쌌다. 계란 풀어 찬밥을 볶은 뒤 멸치볶음을 투하해 섞고 김밥용 김에 말아 썰었다. 전에 김밥 싸먹고 남은 우엉과 단무지를 넣어주는 알뜰함도 잊지 않았다.
8시 30분 수업 개시. 줌(Zoom) 교실에서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지목하며 학교 첫 날의 기분을 물었다. Are you nervous or excited? 엄마, 난 뭐라고 해야 해? 널버스가 먼 말이야? 난 익사이팅하면 돼? 초긴장한 아이의 질문이 쏟아졌고, “I am excited”를 연습시켰다. 무사히 자기 차례를 통과한 아이가 방긋 웃는다. 이후 긴장이 풀어져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누는 이해 못할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몸을 배배 꼬았지만….
더하는 수는 addend, 합은 sum, 차는 difference, 등식은 equation, 4+5=9처럼 거의 두 배가 되는 수는 near doubles…. 까무룩 잊어버린 영어 수학 용어를 사전 뒤져가며 아이에게 가르쳤고, 혼자 책읽기(independent reading) 시간엔 동화책을 영어 및 한국어 두 버전으로 읽어 줬다. 쓰기(writing) 숙제를 대신 써주고 그대로 베껴 쓰게 했다.
여기까지 하니 점심시간. 치즈멜팅샌드위치를 만들고 오븐에 냉동 감자튀김을 구웠다.
오후 수업은 각자 숙제를 하는 시간이어서, 그 시간에 선생님이 읽어줬으나 아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 동화책, ‘First day jitters’를 또 영어 및 한국어 버전으로 읽어줬다(이 책 재밌다. 개학 앞두고 긴장하는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제격. 특히 반전이 대단하다). 아, 중간 중간 혼자 알아서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는 큰 아이가 호출하면 달려가 민원을 해결해줬다.
오후 2시, 아이들은 게임을 하고 나는 20분 정도 까무룩 잠들었다 깼다.
게임이 끝나자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하는 동생과, 싫다고, 야구도 바둑도 하기 싫다고 외치는 형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둘 다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꽥 지른 덕분에(?) 놀이터 나가 놀기로 극적 타결이 이뤄졌다. 잠깐 기다려. 엄마 커피 좀 사가자. 집 앞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 코르타도(Cafe Cortado) 한 잔을 샀다. 애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난 벤치에 앉아 커피 마시며 책을 읽으니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며 마음이 급 너그러워졌다.
오후 5시, 작은 아이의 축구 수업시간.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자신이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한다. 덕분에 브런치에 올릴 글을 하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후 6시, 작은 아이가 땀에 절어 돌아왔고, 욕조에 담가놨다가 씻기고 저녁 밥을 지었다. 잠깐 구글 클래스를 확인해봤더니 그 사이 ELS 선생님이 수업 자료를 올려뒀다. 밥 먹고 치운 다음 이걸 또 해야겠구나. 오늘 메뉴는 고등어구이와 두부조림. 어제 저녁 멸치육수에 무를 푹 고아서 어묵탕을 끓이고 닭다리고추장오븐구이를 만든 것보다는 간단해 금방 밥을 차렸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오늘의 하이라이트인데,)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ELS 수업자료를 아이와 함께 보다가 아이보다 내가 더 감동 받았다. 영어의 땅에 처음 온 친구들을 위한 상냥한 동화책이라니!
책 제목은 ‘Chrysanthemum’, 즉 ‘국화’다.
생쥐 부부가 딸을 낳고 너무 귀해서 아기에게 완벽한 이름을 지어준다. 바로 ‘크리샌떠멈’. 크리샌떠멈은 자기 이름을 좋아하며 무럭무럭 자란다. 하지만 유치원에 가서 놀림을 받는다. 케빈, 조, 루시, 빅토리아 등의 이름을 가진 친구들은 크리샌떠멈 이름이 너무 길다고, 어떻게 꽃에서 이름을 따올 수 있냐고 웃어대고, 너는 꽃밭에서 벌레랑 더러운 것들이랑 같이 살지? 하며 놀린다. 크리샌떠멈은 더이상 자기 이름이 좋지 않다.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도 꽃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곧 태어날 자신의 아기가 딸이면 크리샌떠멈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줄 거란 얘기에 친구들 태도는 급반전. 자기들 이름도 꽃 이름이면 좋겠다며 크리샌떠멈을 부러워한다.
이상의 책을 선생님이 보내준 링크를 타고 동영상으로 보았다.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삽화가 상세하고 같은 단어가 계속 반복돼 아이는 어느 정도 이해하며 재밌어했다. 특히 ‘크리샌떠멈’은 100번 이상 등장해 13자나 되는 철자를 아이가 자연스럽게 외워버렸다. “이름 가지고 친구를 놀리면 돼?” “당연히 안 되지~” 혹시라도 이곳 친구들과는 다른 양식의 자기 이름을 걱정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겠지.
ELS 선생님은 별도로 자신을 소개하는 영상도 올렸는데, 거기에 이번 학기 함께 ELS 수업을 들을 친구들에 대해서도 소개해줬다. 아프가니스탄,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온 아이들 모두 이름이 제각각이다. 크리스나 에밀리는 없다. 그래도 좋다. 각자의 이름은 각각 소중한 이름이니까.
회사 관두고 뉴욕까지 와서 집안에 갇혀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부엌떼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한숨 쉬었는데, 하루에 하나를 배운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찬 생활이라고 생각하기로 다짐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국화’를 영어로 뭐라 하는지 몰랐다. Chrysanthemum. 나도 자연스레 외우게 된 이 단어를 가을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