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필요했다

정세랑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추천합니다

by Jeenam Kang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화가 났다. 이후 서울특별시장(葬)으로 5일장이 치러지고, 정권과 평생 여성운동을 했다는 이들까지 이번 사건에 대해 갈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거듭 화가 났다. 가해자가 이해 받고 피해자가 비난 받는 익숙한 전개. 그 지리멸렬함을 적확하고 간명하게 설명하는 문장을 그 무렵 SNS에서 만났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했다. 많은 여성이 이 글귀를 조용하고 빠르게 공유해나갔다. 박원순 사건 불과 한 달 전에 출간된 이 신작 소설을 최근에야 완독했다. 이 문장의 등장을 좀 더 길게 들여다본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행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주인공 심시선은 6·25 전쟁 직후 이주해 간 하와이에서 독일 예술계의 거장 마티아스를 만나고, 제자로 키워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독일로 옮겨간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시선은 마티아스의 집에서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학대에 시달린다. ‘마티아스는 오브제가 말을 하면 견디지 못할 인간이었다’라는 문장에 시선과 마티아스의 관계가 축약돼 있다. 훗날 그녀의 첫 남편이 된 갤러리상(商)이 시선을 데리고 도망치자, 마티아스는 ‘그녀를 사랑했기에 배신을 견딜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시선은 그렇게 온 유럽이 저주하는 ‘아시아에서 온 마녀’가 된다.



"우리 딸들은요? 작게 될 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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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 ‘그루밍’ 등의 용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유무형의 형태로 핍박 받고 학대 받은 20세기의 여성을, 그 여성에게서 뻗어 나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기억하는 이야기.


현실 사회의 가볍지 않은 이슈를 끌어들인 소설이다. 그 점만으로도 읽어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나는 이 할머니, 심시선이 참으로 사랑스러워서 이 소설이 좋았다. 심시선은 질문자의 예상에서 벗어난 엉뚱한 대답을 하면서도 그 안에 뼈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인터뷰이(interviewee)다. 결혼에 대해 ‘도발적인’ 정의를 내리고, 며느리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 하고, 딸은 제쳐두고 아들만 추켜세우는 이를 대놓고 면박 주는 할머니.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시선의 말과 일화를 옮겨본다.


(질문자)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왜요? 할머니가 섹스라고 말하면 웃긴가? (중략)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중략)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보통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살아남고 싶었는데 그냥 살아남고 싶었던 게 아니라 화가로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에 숨죽인 채 생존 전략을 짜야 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꼈고 ‘그 여자는 운 좋게 잘 독립했대’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손님들이 꼭 오빠만을 두고 ‘크게 될 놈’이라고 칭찬했거든요. 어느 날 엄마가 그게 싫었는지 매번 반복해서 말하는 손님한테 “그럼 우리 딸들은요? 작게 될 년들인가?” 하고 확 무안을 줬어요.
KakaoTalk_20200921_180702232.jpg (e북으로 읽어서 인용구에 페이지 표시를 못했습니다.)
예술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천천히 스스로를 해치는 것을 제가 얼마나 자주 봤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수준의 자해입니다. 아아, 이 사람 큰일 났다, 싶을 땐 늦었고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디다. 큰 회사에 다니고, 가업을 잇고, 대단한 돈을 거머쥐고, 다정한 반려인이나 귀여운 아이들을 얻고 나서도 무언가 안에서 그네들을 갉아먹습니다. 기생충이 먹을 게 없으면 내장을 파고들 듯이요.


일종의 도착 지점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게 얼추 이십 년마다 찾아오는 걸 봅니다. (중략)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니야. 저이는 정수기가 정말 좋은 물건이라 생각하고, 매번 좋은 물건을 나한테 챙겨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 것도 괜찮지.”
이해할 수 없을 듯 이해할 수 있었다. 장모님은 그때 산 정수기 물로 커피를 내리면 맛이 부드럽다고, 본인도 별로 믿지 않으면서 주장했었다.



'피해자'도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일 수 있다


colorful-1237235_960_720.png [pixabay]

삶에 질곡이 적지 않고, 거기에 더해 예술가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몹시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시선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도, 그 세계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자식과 손주, 친구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손녀가 방학 숙제로 우표를 수집하는데, 그걸 거들다가 원고 마감까지 까먹고 손녀와 오래된 편지에 붙은 우표를 뜯어내는 데 열중했다는 일화도 있다. 나도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시선의 후손들은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기로 한다. 큰딸 명혜는 모두에게 각자 하와이를 경험하며 최고의 순간이나 물건을 가져와 제사상에 올리라고 한다. 이런 제사라면 지내보고 싶고, 사후에 받아보고도 싶다. 시선의 딸, 아들, 며느리, 사위, 손녀, 손자가 각자 가져온 훌라 춤, 팬케이크, 커피, 무지개 사진 등등 중에서 나는 손녀 우윤이 가져온 파도 거품이 가장 좋았다.


어려서 크게 아팠던 우윤은 서핑에 도전한다. 서핑 강사에게 ‘가능성 없어 보인다’는 눈초리를 받고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바다에 나가 파도에 쓸리고 할큄을 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도전에 완벽한 서핑에 성공한다.


우윤은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탈 수 있어. 이 파도는 탈 수 있어. 보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맨땅 같았다. (중략) 보드는 계속 나아갔고 우윤은 그 위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다리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미끄러지는 것과도 달랐다. 보드 밑에 느껴지는 힘은 우윤이 만나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의 일부 같았다. 바다의 힘, 지구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 우윤은 계속계속 나아갔다.


시선의 10주기 제사가 끝나고 가족은 하와이 공항에서 각자 갈 길로 떠난다. 가장 자유롭게 사는 지수는 서울행 티켓을 취소하고 칠레로 가기로 한다.


“엄마, 나 걱정 안 해?”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지수가 명혜에게 물었다.
“걱정해야 해?”
“맨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제멋대로 사는데?”
“아, 뭐.”
명혜가 안경을 위로 올렸다.
“심시선 여사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추악한 시대를 헤쳐 나오면서도 강건했던 심시선의 후손다운 삶의 태도. 아름답고 멋진 결말이다. 신문 사회면에, 그리고 주변에서 우리는 피해자의 사연을 자주 만난다. 보통은 범죄나 그에 준하는 비극적 결말에 초점이 맞춰진다. 피해자의 ‘그 이후의 삶’은 대게 관심 밖이다. 피해자에게 그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조차 우리는 잊기 일쑤다.


하지만 <시선으로부터,>는 ‘그리고 그 이후의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한다. 피해자 역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일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선으로부터,>는 지금 딱 이 시점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