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사지 않는 생활

'매콤삼겹김밥'을 만들기까지

by Jeenam Kang
미스 피기 [google]
자신이 들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먹지 말라
(Never eat more than you can lift).


미국 머펫 쇼(The Muppet Show)의 돼지 아가씨 ‘미스 피기’가 남긴 음식에 관한 유명한 명언이다.


워킹맘 시절의 나를 반성하는 버전으로 이 명언을 고쳐본다.


자신이 요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사지 말라
(Never buy more than you can cook).


아이들 먹는 것은 근처 사시는 친정 엄마가 전담했고, 나와 남편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은 주말을 빼면 일주일에 고작 하루 이틀이었다.


우리 집 주방은 주말에만 가동됐다. 그나마도 외식하거나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일요일 아침, 멍한 상태에서 ‘아, 아침은 뭘 해 먹지’ 고민하는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방금 싼 김밥이나 뜨끈한 미역국이 (친정으로부터) 배달되는 ‘개꿀’인 날도 종종 있었다.

모처럼 월남쌈이나 전골 같은 걸 해 먹겠다고 식재료를 잔뜩 사 오면, 남은 식재료는 냉장고 안에서 그대로 썩었다. 석 달간 당근을 냉장고 야채실에 넣어놓고 건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분? 냄새가 고약한 물이 된다…. 몇 년 전 “대체 누가 냉장고에 썩은 물을 넣어놓은 거야?!” 하고 외쳤다가, 그게 내가 사놓은 당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중학 시절 우리 동네에 ‘소문난 분식’이라고, 양배추를 잔뜩 넣은 달달한 떡볶이를 팔았던 분식집이 있었다. 그 집 떡볶이를 그리워하며 양배추를 사다가 떡볶이를 해 먹으면, 남은 양배추는 반드시 색이 변하며 흐물흐물해졌다. 우리 집 주방에서 썩어나가지 않는 식재료는 없어서 못 먹는 한우가 유일했다.

처음엔 돈이 아까웠다. 그다음은 썩은 식재료를 처리하는 게 고달팠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반성이 찾아왔다. 먹을 게 부족한 세계 난민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이전에, 조금만 부지런하면 음식물 낭비는 막을 수 있을 텐데 싶어서.


친정 엄마에게 요리하고 남은 돼지 목살과 새송이버섯을 가져다주면 훌륭한 저녁 식사가 됐을 테고, 퇴근길 마트에서 즉흥적으로 이거 저거 카트에 담기 전에 냉장고 재고부터 파악했더라면 애호박 2개를 동시에 보유하는 당혹감은 피할 수 있었을 거다. "회사 일이 바빠서 냉장고 들여다볼 여유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곤 했었지.


퇴사자의 주방에 버리는 음식은 없다


퇴사 이후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맘먹은 것 중 하나는 이거다.


“퇴사자의 주방에 버리는 음식은 없다.”


당분간 뉴욕에서 ‘삼식이’ 셋을 거둬먹어야 하고, 뉴욕은 외식 물가가 비싼 데다 코로나로 인해 식당에서의 식사가 어렵고, 또 나의 퇴사로 가계 수입이 확 줄었으니 사실 먹는 데 낭비할 돈이 없다. 그리고 성실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회사 일은 '졸업'했으니 이제 주방 일로 성실해보자!


뉴욕 코스트코에서 장보기. taken by jeenam.kang

고기는 코스트코가 가장 저렴하다. 뉴욕 도착 이튿날 코스트코에 가서 두 근 정도 되는 스테이크용 쇠고기와 삼겹살 등등을 사 왔다.


쇠고기 절반은 그날 스테이크로 구워 먹고, 나머지를 반씩 소분해 냉동고에 얼려 놨다. 며칠 후 하나를 꺼내 해동한 뒤 잘게 썰어 미역국을 끓였다. 쇠고기 미역국은 양지머리로 끓여야 하지만, 미국에선 한인마트에서 파는 양지머리가 코스트코 스테이크보다 비싸다. 그런데 잘게 썰은 쇠고기가 남는다. 이걸 냉장실에 넣어놨다가 이틀 후 방울양배추(Brussels sprouts)를 넣고 쇠고기 볶음을 만들었다. 양념은 간장과 설탕 약간. 아직 미림을 마련하지 못했으므로 소주 한 잔으로 잡내 없애기.


코스트코 삼겹살로 만든 제육볶음. taken by jeenam.kang

“제육볶음 해줄까?”(나)

“(두 눈 동그랗게 뜨고) 할 수 있어?”(남편)


남편은 혼자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샐러드 사다 먹고, 쇠고기 구워 먹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한식 없이도 잘 지낸다 싶었는데, 매운 우리 음식 얘기를 꺼내자마자 무지 좋아하면서도 ‘과연 당신이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냉동한 삼겹살 절반을 해동해 프라이팬에 구운 다음 각종 야채를 넣어 볶는다. 양념(간장, 고춧가루, 설탕 약간)을 넣고 볶다가 물 반 컵을 넣어준다. 파를 많이 넣는 게 핵심인데, 이 동네엔 대파가 없어 쪽파 비슷한 걸 잔뜩. 돼지 앞다리살에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아 평소 한국 식당서 먹는 제육볶음과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양이 너무 많았는지 제육볶음이 좀 남았다. 야채는 과감하게(?) 버리기로 하고, 삼겹살만 잘게 썰어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매콤 삼겹살 김밥’ 말기 시작. 계란, 우엉, 단무지, 시금치, 어묵, 그리고 햄 대신에 매콤하게 양념된 삼겹살을 넣는 거다. ‘바르다 김선생’에 제육쌈김밥이 있다면, 내 주방엔 매콤삼겹김밥이 있는 셈! 김밥을 아작아작 씹다 보면 매콤한 맛이 입 안으로 사르르 퍼지는 게 꽤 괜찮다. 남편과 큰아이 둘 다 엄지 척.


남은 제육볶음을 볶아서 김밥 속으로. taken by jeenam.kang



가난해진 느낌 말고, 성실해진 마음가짐으로


휴일 오후 센트럴파크로 야구하러 나가는 날. 홀푸즈마켓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치킨을 샀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뛰느라 바빠서 치킨 절반이 그대로 남았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버렸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지. 집으로 싸 갖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놨다. 그리고 이튿날 점심으로 간장치킨덮밥을 만들었다.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칠 때 간장과 설탕 약간, 양파, 그리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치킨을 넣는다(치킨스톡을 넣어주면 더 맛있다고 한다). 밥이 완성되면 치킨은 푹 삶은 것처럼 뜨겁고 부들부들해져 있다. 따라서 아주 쉽게 뼈를 발라낼 수 있다. 그다음 치킨 살을 잘게 자른다. 간이 약하다면 간장을 더 넣고 참기름을 두른 뒤 쉐킷쉐킷.


아이들은 이 치킨이 어제 그 치킨인 줄 모르고 맛있다며 잘 먹는다. 나도 '뭐, 맛 좋은데!' 싶다. 하지만 남편의 한 마디. “우리 좀 가난해진 느낌이다….” 그간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썩여버린 식재료를 되짚어보면 '가난해진 느낌' 따윈 사치야, 여보.


식은 치킨의 변신 과정. taken by jeenam.kang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서는 코스트코에서 저렴하다며 큰 봉지 째 사놓은 아스파라거스가 시들어가고 있다. 오늘 저녁엔 아스파라거스를 잔뜩 넣고 베이컨 볶음을 할 예정. 다시 한번 되뇐다. Never buy more than you can c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