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애도하는 시간

책 ‘당신의 특별한 우울’과 함께 한 퇴사

by Jeenam Kang
김밥 한 줄과 야근하던 시절. taken by jeenam.kang

“언니, 기분 이상하지 않아? 나는 한동안 출근 시간에 맞춰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집에 가만 앉아 있었어.”

막내 동생은 대학병원 간호사였다. 결혼 후 제부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느라 몇 해 전 10년간 근무한 병원을 그만뒀다. 내 경우 동생보다 2배 가까운 세월동안 한 회사를 다녔다. 회사 덕분에 동생의 대입 과외비를 내줄 수 있었고, 대학 재학 중엔 매달 용돈도 줬었다.


“어, 난 뭐, 괜찮아” 하고 얼버무렸다. 퇴사를 전후해 새벽 네댓 시에 잠에서 깨 두어 시간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것 말고는 하루 종일 바빴으니까. 아이들 깨워 아침밥 차려주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수도권 확산으로 전면 온라인으로 전환된) 학교 수업 듣게 하고, 숙제를 챙겨줬다. 남편이 회사 파견으로 주재하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갈 예정이라, 살림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일로도 바빴다. 고맙게도 여러 동료와 몇몇 취재원이 “떠나기 전에 꼭 보자”고 해 점심 약속, 커피 약속도 적지 않았다.


그런다고 상실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출퇴근 지하철에 부대끼고, 점심시간 동료들과 신나게 떠들고, 날을 세우다가 타협했다가 하면서 종종 ‘나 좀 멋졌다’ 싶은 기사를 써내는 시간들. 너무 당연해서 벗어나고 싶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이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바쁜 척하며 유예한 상실감에 뒤늦게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당신의 특별한 우울’이다.



우울증 앓는 정신과 전문의의 에세이

'당신의 특별한 우울' 책 표지(왼쪽)와 저자 린다 개스크. [YES24, Google]


우울증을 유발하는 계기는 ‘상실’일 때가 많다. 잃은 것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역할이나 건강이나 자존감일 수도 있다.


저자 린다 개스크(Linda Gask)는 영국의 정신과 전문의이자, 오랜 세월 본인 스스로가 우울증에 시달려온 환자다. 그러니 ‘우울증의 세계’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말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역할이나 자존감을 잃는 일도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니, 퇴사자로서 밑줄 좍.


린다는 본인의 경험과 환자들의 사연을 교차하면서 우울증에 대해 탐구해나간다. 기억해두고 싶은 대목을 옮겨본다.


우울증은 대단히 개인적인 병이다. 벌레가 사과 속을 파고들 듯 우리 영혼 속을 파고들어 자아정체감을 좀먹고, 살아갈 이유를 빼앗아간다. 우울증을 다스릴 방법은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건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해로운 것은 그 사람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건드리는 경우다. 열쇠가 짝이 맞는 자물쇠를 찾아가듯, 그 사람의 취약점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건이 꼭 일어나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다.


사람마다 고통 받는 사연이 다 다르고 우울증을 앓게 된 이유도 다 다르다. 인간으로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여러 현실들이 복잡하게 함께 얽혀 있다. 저마다 안고 있는 경험들을 인정하고 다루지 않고서는 우울증이 낫도록 도울 수 없다. 약 복용만으로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나 무언가를 잃으면 그 상실을 애통해한다. 하지만 애통해하는 것은 인간이 정상적으로 겪는 과정으로서, 우울과는 다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도, 중요한 직장을 잃었을 때도, 건강을 잃었을 때도 애통해한다. 앞날의 꿈이 사라졌거나, 다시없는 기회를 놓쳤을 때도 애통해하기도 한다. … 그것 없이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거나, 심지어 자기감정을 전혀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복합적 애도 complicated grief’라고 하며, 이 상태는 우울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애통함은 정상적인 감정이고, 시간이 지나면 보통 해소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애통함은 우울증과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상실을 견디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똑같다.


나는 우울증을 버텨냈고, 무사히 살아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상실에 대해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 애도의 시간을 잘 보내야 애통함 같은 감정이 해소된다는 것. 심사숙고해서 퇴사를 결정했음에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쨌거나 18년의 긴 시간동안 내 밥줄이자 정체성이자 일상이었던 직장을 떠난 거니까. 퇴사자에게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에 집중하며 '생각의 강'건너기


생각의 커피. taken by jeenam.kang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평소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나는 카페에 가만 앉아 커피를 마신다. 설거지라든가 빨래 개기 같은 집안일에 몰두하고, 이메일 수신함과 업무 폴더의 파일을 정리한다. 일상에 집중하면서 생각의 강을 헤엄치는 셈인데, 린다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는 ‘마음챙김’에 해당한다. 괴로운 생각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관찰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러면서 괴롭다는 감정이나 괴로움의 원인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불교의 사상과 수행에서 유래한 ‘마음챙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괴로운 생각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마음챙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날그날 반복되는 일과에 집중하다 보니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3킬로미터 거리의 가게를 걸어서 다녀오고, 창가 책장에 앉아 독서하고 글 쓰고, 바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챙김 기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자라는 게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막 애통하거나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서운하고 이상하고 여전히 휴가 중인 것 같은 퇴사자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놔두려고 한다. 2018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평균기간은 6.1년. 그보다 한참 긴 세월을 한 공간에서 머물다가 휙 나와 버렸으니 달라진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우울증을 다스릴 방법은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고 린다는 말한다. 이 문장에서 우울증을 ‘퇴사증(退社症)’으로 바꿔본다. 퇴사로 인한 복잡한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야 한다고. 그리고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