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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Nov 14. 2020

초조함

아끼고 모은 돈이 2년 만에 날아갔다.

나는 후회라는 것을 잘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숱한 후회와 후회 뒤에 반드시 뒤따르는 부끄러움에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던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후회라는 감정이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되려 그때 그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했던 나를 충분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어리석고 미숙했던 그때의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고 보면 후회되는 그 결정이 그때에는 최선이었다.


2017년 햇볕이 유난히 따가웠던 여름의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살고 있는 싱글 여성이었다. 속으로는 흐물흐물해져 형태라곤 알아볼 수 없는, 여름 볕에 녹아버린 초콜릿과 같았다. 내 나이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이었다. 남들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으리라 기대했던 마흔은 나에게 없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기업에 취직하여 살고 있었지만 대단한 부(富)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의 부동 열풍과 더불어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내 집"을 마련하고 있는 모습에 안함과 초조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아는 언니와 어느 분양대행사에 합법적으로 속아 적지 않은 분양 계약금을 잃었다. (이것이 합법적인 사기라는 것도 나중에 법적 해결안을 찾던 중에 알게 된 일이다.) 어떤 사정으로 얼마의 금액을 잃었는지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열심히 모았던 돈의 일부를 꽤 빠른 시간 안에 잃었던 경험을 내가 의미 있었던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그 사기를 당한 과정과 그 문제를 해결하던 과정이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느끼고 깨달은 바는 수도 없이 많지만,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잘못된 부지런함, 즉 조급함을 버리고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정립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월급쟁이 부자들" 카페지기인 너나위 님도 유튜버 신사임당과의 인터뷰에서 지나친 부지런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 또한 회사에서 성실하고 신체 건강한 후배들이 일단 뛰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오히려 더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제 발생 시, 침착하게 해결안을 모색하기 전에 몸이 먼저 나가게 되면 효율적인 해결이 더 어렵고 손해를 보기도 한다.

처음 분양계약에 대한 권유를 받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문장은 조지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였다. 또다시 생각해보고, 검토만 하다가 아무것도 지 못하게 될 모습만이 두려웠다. 그 외에 벌어질 수 있는 더 크고 가능성 높은 리스크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증권업계에 종사 중인 남동생이 "세상에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수익을 주는 금융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부를 쌓지 못한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나는 그저 "빠른 행동의 부재"만이 나의 문제라고 오판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을 어느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속도를 생각하기에 앞서 조금은 늦더라도 나만의 삶의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어야 했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남들과 세상의 물결에 둥둥 떠서 흘러갈 뿐이다.


둘째, 부를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감당의 과정을 통해 올바른 부자가 되는 길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분양 계약 이후에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수많은 계약 관련 서류들을 보관해야 했다. 세금 신고철이 되면 부가가치세 환급이라는 복잡한 신청절차를 밟아야 했다. 계약 철회 이후에는 환급받았던 부가가치세를 돌려내는 복잡한 과정을 다시 거쳤다. 자산을 소유했다는 행복감 대비 너무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일들이었다. 그래서 친한 직장 동료 이양과 고양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하나?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은 실소했고,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가졌을 때의 불편함은 가지기 위해 응당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이지. 아무 불편함도 없이 무엇을 어떻게 가질 수 있어?"

2020년에 유튜브에서 주식투자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유명인이 된 메리츠증권 존 리 대표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 차, 명품, 해외여행을 잠시 미루고 주식에 투자한 후 그것들은 은퇴 후에 즐기라고 하면, 대개 늙어서 즐기면 뭐하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젊은 시절 경험의 손실보다 늙은 후의 경제적 손실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세상만사 모두 운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그래서 많은 현인들은 왜 사는지, 왜 하는지를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어졌을 뿐이므로. 그러나 대체로 세상은 무언가를 감수할 경우에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돌아가는 편이다. 젊은 시절의 희생이 노년의 여유로움을 제공할 것이고, 나 또한 직장생활 10년간 허리띠를 졸라매며 모았던 돈이 있었기에, 그 일부를 잃었어도 어렵지 않게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셋째,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은 없으며, 그래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상의 모든 일은 운이다. 앞서 고수익의 허상에 대해 일침을 가했던 남동생은 운칠기삼이 아닌 운구기일이 세상의 돌아가는 원칙이라고 장난 삼아 얘기하기도 한다. 내가 직면한 현실이 운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주어진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며, 내가 해낸 일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되지 않은 일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 수원에 있는 여성병원 원장님의 간증을 들은 경험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그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동업한 동료들로부터 병원에서 쫓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병원을 설립한 것이 자신이라는 자만을 버리는 순간부터 슬픔과 비참함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여 결국 동업자들은 병원을 떠남과 동시에 본인은 병원을 다시 찾 수 있었다고 한다.

나도 열심히 모은 돈을 잃었다는 서글픔에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시간 나의 재무관리를 지원해 주고 계신 생명보험사 이사님의 조언 덕에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사님의 고객 중에는 나와 비슷한 금액의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만큼 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교육과 재정 문제를 돌볼 수 있는 부모님이 없거나, 오히려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할 가족들이 있어서 나와 같은 저축이 불가능다는 것이다. 반면 나는 부모님의 지원이 가능한 가정형편 덕분에 나만의 자금 모음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자산은 오로지 나 혼자서 해낸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에게는 음과 건강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삶이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내가 지치고 좌절해야 하는가? 내가 할 일은 지난 일을 반성하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다시 시작하는 일뿐이다.


마지막 삶을 심플하게 재정비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수이자 작가인 장기하는 "창작은 결국 요약이다"라고 했다. 심플하고 간결한 생각과 말과 행동 없이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심플하고 간결하게 정리해두면 주어진 시간과 공간과 에너지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내가 오판하여 내린 재테크 행위는 내 인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도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계약 관계, 법적 문제, 서류, 정보들을 정리하고 털어내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또한  과정에서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와 인간관계의 우선순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중요한 일 중심으로 일하면서 업무와 대인관계의 질이 한결 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무소유와 심플한 라이프스타일을 설파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유한 사람들조차 더 유용한 소유를 위해 심플함을 지향한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경제전문가인 로버트 기요사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부자가 되기 위한 원칙을 KISS(Keep It Super Simple)라고 정리한 바 있다.


메리츠증권 존 리 대표는 어느 강의에서 "사람이 기업이 나라꼴찌를 경험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존 리 신동일의 꿈발전소 특강)"라 다. 나쁜 일은 겪지 않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왕 겪은 나쁜 일이라면 어쩌겠는가? 더 나은 삶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꽤나 큰 경제적 손해라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의 재정비에 대해 생각조차 않았을 것이다. 나의 초조함으로 인한 큰 실수는 내 변화 계기가 되었고, 이 글은 내가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정리하는 계획서가 될 것이다.


말과 글의 힘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나와 타자와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깊이 깨달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홍승은 작가는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서 그녀와 어머니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해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넷플릭스의 장편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1950년대 노령의 찰스 윈스턴은 구시대적이고 보수적인 행보로 수상으로서의 자격에 대한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조지 6세의 승하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묵직하고도 품격 있는 연설을 통해 주변의 비난을 일축한다. 얼마 전 조 바이든과 함께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부통령 카밀라 해리슨은 민주주의와 여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침착한 어조로 보여주었다. (정치인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글썽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의 글이 어떠한 상황에서 겪는 아픔이든, 좀 더 심플하고 현명하고 지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주 작은 자극이라도 되기를 기도해본다.

  

- 뭉크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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