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비계를 사랑했던 소녀의 반전 스토리
“살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귀인이 찾아온다.”라는 말은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을 안겨준다.
귀인이란 조선 시 대 종1품의 서열을 가리키는 궁중 용어지만, 일상에서는 ‘내게 귀한 도움이 되고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귀인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귀인을 알아 보는 능력일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인연을 만나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연 중에 내 인생 최고의 귀인은 단연코 ‘우리 엄마’다.
세 자매 중 장녀였던 나는 식탐이 많았다. 동생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늘 나만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쥐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나를 찾기보다 빵이나 떡 봉지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넘치는 식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욕심의 종류가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다른 방향으로 열정을 쏟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모든 욕심이 식욕으로만 폭발하던 때였다.
그렇게 나는 비만아가 되었고, 통통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뚱뚱한 아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살쪘다”라는 말을 듣게 되고, 내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자존감이 하락할수록 거울 보는 것조차 피했고,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주말에도, 집안 행사에도 교복 두 벌을 빨아 번 갈아 입고 다녔다.
한창 예쁜 것을 좋아하고 멋을 부리는 나이였지만, 뚱뚱한 몸을 보는 것 자체가 싫었던 나는 자신을 포기한 상태였다. 아마 이 모습이 엄마에게는 안쓰럽고 걱정 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내가 고3을 졸업할 즈음, 엄마는 굳은 결심을 하셨다.
“매일 아침 남한산성 꼭대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자!”
그렇게 이른바 ‘지옥의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매 순간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 근육은 경련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땀은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산에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 의연해 보이는데, 그 사이에 있는 나는 초라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처음엔 한 번 오를 때마다 기진맥진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이 이 길을 기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오르다 보니 하루하루가 쌓여 나를 조금씩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매일 하는 도전이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다.
비가 쏟아졌고,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질까 두려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힘겨웠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힘든 날도 이겨내야 해.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지도 못하잖아,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효도는 엄마가 원하는 산에 오르는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이어갔다.
두 달 동안, 영혼이 고갈될 듯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산행을 매일 반복한 끝에, 나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뚱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달라졌다”라며 놀라워했다.
몸무게가 드라마틱하게 빠진 건 아니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놀라 운 건 예전에는 교복 밖에 몰랐던 내가 예쁜 옷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남자 친구들이 생기고, 누군가는 연애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지옥의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엄마의 선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나에게 늘 ‘겸손과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늘 감사 할 줄 알아야 해.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엄마의 가르침 덕분에 인생을 살며 마주치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주변의 도 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그럴 때마다 엄마가 강조하던 ‘겸손과 감사’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은혜와 사랑을 글로 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결코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의 귀인은 바로 우리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