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케이크', 갈레뜨 데 호아 (galette des rois) 이야기
프랑스의 새해를 알리는 가장 확실한 신호는 역시나 '갈레뜨 데 호아'(galette des rois), '왕 케이크'이다.
연말 내내 모든 빵집들의 쇼윈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부쉬 드 노엘' (bûche de Noël: 크리스마스 케이크)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를 투박하고 묵직한 '갈레뜨 데 호아'가 대신 채운다.
동방의 세 왕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날인 주님 공현 대축일(épiphanie; 주현절)에 먹는 갈레뜨 데 호아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들이 많으나, 길게는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에는 동지 기간 동안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있었는데, 이날만큼은 노예들이 로마인들과 함께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고, 노예 중 한 명을 임시 '왕'으로 뽑아 그날의 축제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후 중세 시대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주현절을 기념해 아몬드 크림을 채운 파이를 만든 것이 오늘날의 갈레뜨 데 호아의 시초가 되었다.
이 디저트는 로마에서 노예 중 한 명을 축제의 왕으로 뽑던 관습과 결합되어, 17세기 프랑스 왕실에서는 갈레뜨 데 호아 안에 숨겨진 강낭콩을 찾은 여성이 국왕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유쾌한 연회 문화로 정착했다.
이렇게 단단히 자리 잡은 듯했던 갈레뜨 데 호아에게도 위기의 시기가 있었다.
프랑스의 1711년 대기근 때는 빵 이외의 밀가루 사용이 금지되면서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왕(Roi)'이라는 이름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는데, '평등의 케이크'라는 궁색한 개명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갈레뜨 데 호아를 한 번 맛보면 이 디저트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사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화려할 것 없는 파이를 베어 물면 바사삭 소리와 함께 페스츄리 가루가 후드득 떨어진다.
그 안에 들어있는 프랑지판(frangipane: 아몬드 가루를 넣은 커스터드 크림)은 또 얼마나 부드러우면서 꾸덕한 지!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크림 속에 숨어있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갈레뜨 데 호아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안에 숨겨진 '페브'(fève).
페브는 강낭콩을 뜻하는데, 과거에는 실제로 강낭콩을 사용했으나 속임수 쓰는 것을 방지하려고 독특한 모양의 작은 도자기 인형을 넣는 것으로 진화했다는 설이 있다.
'왕 게임'에 진심인 프랑스 사람들은 공정성을 더하기 위해 이런 룰도 추가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어린아이가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각 조각의 주인을 외치는 것이다.
그렇게 나누어 받은 갈레트를 먹다 페브를 발견한 사람은 그날의 '왕'이 되어 황금 종이 왕관을 쓰고, 모두의
축하를 받는다.
이 달콤한 축제에 빠지면 안 되는 필수템이 있으니 그건 바로 톡 쏘는 황금빛 시드르(cidre)이다.
사과주스를 발효해 만드는 사과주인 시드르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누구나 마시기 편하다.
버터의 풍미가 진한 갈레뜨 한 입 뒤에 바로 이어 시원하고 상큼한 시드르를 한 모금 들이키면 이유 있는 조합에 감탄하게 된다.
파티시에들에게 갈레뜨 데 호아는 자존심 싸움이기도 하다.
새로운 해를 시작하며 본인의 특색과 기량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프랑지판맛 갈레뜨도 여전히 사랑받지만, 스타 셰프들은 매년 자신만의 '시그니처 갈레뜨'를 발표한다.
올해는 '두바이 초콜릿'의 영향이 계속되는 덕인지 피스타치오맛 갈레뜨 데 호아가 눈에 많이 띈다.
시릴 리냑(Cyril Lignac)은 피스타치오와 배를, 안젤리나(Angelina)는 피스타치오와 잔두야(헤이즐넛 초콜릿 크림)를 넣은 갈레뜨를 내놓았다.
상큼한 과일향이 들어간 갈레뜨도 인기가 많은데, 올해 피에르 에르메(Pierre Hermé)의 시그니처 갈레뜨에는 패션후르트와 구운 파인애플이 들어갔다.
파리에서 인기가 많은 일본 출신 파티시에들이 선보이는 흑임자와 말차를 넣은 갈레뜨는 특히 우리 입맛에 딱이다.
인기 파티시에들의 갈레뜨 데 호아는 맛뿐만 아니라 모양도 남다르다.
2024년 세계 최고 파티시에로 뽑힌 니나 메타에 (Nina Métayer)는 매년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갈레뜨로 승부수를 둔다.
요즘은 페브와 심지어는 종이 왕관까지 유명 디자이너와 콜라보해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파리에서 단 하나의 빵집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포알란(Poilâne)을 뽑는데, 이곳의 시그니처인 헤이즐넛과 초콜릿이 들어간 갈레뜨도 맛있지만, 매년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로 나오는 단추모양의 페브와 독특한 디자인의 종이 왕관은 수집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매년 진화하는 갈레뜨 데 호아 덕분에 올해도 나 같은 갈레뜨 데 호아 광팬들은 굉장한 고민에 빠진다.
일 년 중 딱 지금, 1월 중에 내가 좋아하는 파티시에들의 갈레뜨 데 호아를 한 번씩 다 맛봐야 한다는 조급함과 그에 따라 두둑해지는 뱃살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그러나 갈레뜨 데 호아의 진짜 특별함은 맛도, 모양도, 한정판 페브도 아닌 듯하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은 차가운 겨울, 다시 한번 소중한 사람들을 식탁으로 불러 모으는 다정한 핑계가 되어주는 갈레뜨 데 호아.
누군가의 조각에서 페브가 나올 때 터져 나오는 환호성, 그리고 왕관을 씌워주며 나누는 덕담 속에서 프랑스인들의 새해가 비로소 완성된다.
방금 이번 주 일요일에 집에 놀러 오기로 한 친구들에게 문자가 왔다.
"디저트로 갈레뜨 데 호아 가져갈게, 괜찮지?"
얼른 답장을 보낸다.
"시드르는 우리가 준비할게. 달달한 게(doux) 좋아 드라이한 게(brut) 좋아?"
<빠리냠냠 레시피> 다크초콜릿과 배를 넣은 갈레뜨 데 호아
몇 년 전 겨울, 길을 걷다가 패스츄리 생지를 만드는 회사인 에르타(Herta)에서 갈레뜨 데 호아 레시피와 페브, 종이왕관까지 세트로 길에서 나누어주는 것을 우연히 받았다.
그 안에서 딱 내 취향의 레시피를 발견했으니, 바로 다크초콜릿과 배를 넣은 갈레뜨 데 호아이다.
내 입맛대로 단맛을 줄여서 매년 이맘때쯤 한 번씩 만든다.
재료: 배 통조림 한 통, 버터 125g, 다크초콜릿 200g, 계란 2개+노른자 하나, 설탕 40g, 세몰리나 가루 100g, 패스츄리 생지(pâte feuilletée) 2장, 페브 (혹은 강낭콩)
1. 배는 통조림을 사서 (배 2개 분량) 작은 큐브 모양으로 자른다.
2. 실온에서 부드러워진 버터 125g, 전자레인지에 녹인 다크초콜릿 200g, 계란 2개, 설탕 40g (본 레시피는 125g)을 넣고 크림화한다.
3. 여기에 세몰리나 가루 100g을 넣어 잘 섞어주면 필링 준비 끝.
4. 첫 번째 파이지를 종이호일 채로 오븐팬에 펼쳐준다.
5. 여기에 위의 초콜릿 필링을 고르게 펴서 바르는데, 테두리에 2-3cm 여유를 남겨둔다.
6. 이때 가장 중요한 **페브**를 넣어야 한다. (페브로 쓸만한 작은 도자기 인형이 없다면, 진짜 강낭콩을 넣는 것도 가능)
7. 그 위에 잘라둔 배를 올리고, 파이지 테두리에 물을 바른 후, 그 위에 두 번째 파이지를 덮는다.
8. 포크로 테두리를 눌러 파이지 두 장을 붙여주고, 끝이 날카로운 칼로 파이지에 칼집 장식을 내어준다.
9. 황금빛 구음색을 위해 계란 노른자 하나에 물 한 스푼을 섞어 파이지 위에 고루 발라준다.
10. 200도 오븐에서 30분 구우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