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니, 에쉬레, 보르디에...깊고 부드러운 프랑스 버터 이야기
십년 간 프랑스에 살면서 새로 접한 참 많은 식재료와 요리들 외에, 늘 알고 있었지만 재발견한 것들도 여럿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버터.
어렸을 때부터 버터는 늘 냉장고 문칸 구석 어딘가에 있었지만, 버터가 들어간 음식을 그렇다하게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기껏해야 엄마가 식빵을 구울 때 프라이팬에 버터 녹이는 향이 나면, 조금 더 고소하고 바삭한 식빵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정도.
그나마도 버터가 몸에 좋지 않다며 엄마는 식빵에 버터물이 스칠 정도로만 조금씩 떼어서 썼었다.
버터의 은박포장이 너덜너덜해지고 언제 사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을 때 쯤, 어느날 마트에서 네모반듯한 버터를 보면 옛날 건 버리고 그냥 새로 하나 사자 했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냉장고에는 늘 무염버터, 가염버터, 특별한 맛이 들어간 가미버터가 구비되어 있다.
버터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오해도 풀려서, 좋은 지방원이자 미네랄과 풍미를 더해주는 버터를 사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자연스레 250g짜리 손바닥만한 버터는 너무 빨리 소진되니 늘 500g짜리 벽돌 버터를 사둔다.
프랑스인들은 연간 일인당 평균 8.2kg 버터를 먹는다고 한다.
갓난 아기까지 다 포함한 수치이니, 일반 성인은 훨씬 더 많은 양의 버터를 먹는다는 뜻.
버터 소비량으로만 보면 나도 프랑스인 축에 당당히 낄만한다.
프랑스 버터는 대체 뭐가 그리 특별한 걸까?
첫째, 프랑스 버터는 대부분 "발효 버터"이다.
우유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유산균이 향을 만들어 더 깊고 고소한 맛이 생긴다.
둘째, 프랑스 버터는 지방 함량 기준이 엄격하다.
버터는 최소 82% 이상이어야 하며 (가염버터는 80%), 그보다 낮으면 버터라고 표기할 수 없다.
높은 지방 함량 덕분에 질감이 탄탄하면서도 입에서 녹을 때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셋째, 프랑스 버터는 기타 첨가물 없이 오로지 우유로만 만들어진다.
프랑스에서 버터 포장지에 적힌 재료를 보면 크림과 (우유에서 나온) 발효균이 전부이다.
그럼 이렇게 단순한 재료에서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황금빛의 버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우선 우유의 유지방을 모은 크림을 발효한 후, 물리적으로 휘저어 지방 덩어리를 수분과 분리해낸다.
이 덩어리를 반죽해 지방과 수분이 안정적으로 엉겨있도록 모양을 잡으면 버터가 완성된다.
이 과정을 알고나면 프랑스 버터 포장지에 적힌 단어들에 대한 이해가 쉬워진다.
브어(beurre)는 버터, 여기에 엑스트하-핀(extra-fin)이라고 되어 있으면 72시간 내에 착유된, 냉동한 적 없는 살균 크림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크뤼(cru)는 살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크림으로 만들었다는 뜻.
맛도 더 깊고 영양가적으로도 우수하지만, 보존기간이 짧아 일반 슈퍼보다는 치즈전문가게에서 찾기 쉽다.
바하트(baratte)라는 용어는 전통적인 교반기(크림을 휘젓는 통)를 사용해 만든 버터에만 사용된다.
이 방식에서는 생크림을 약 15시간 숙성한 후 전통 교반기로 휘저어 버터를 만든다.
두(doux)는 무염, 드미-셀(demi-sel)은 가염을 뜻한다.
가염버터의 경우 총 중량의 2% 내외의 소금이 추가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프랑스의 버터는 와인과 치즈처럼 '떼루아'(terroir), 즉 '땅의 맛'을 품고 있다.
같은 버터라도 지역이 바뀌면 향과 질감이 바뀌는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 AOP 표시를 찾으면 된다.
프랑스의 농축산식품에 적용되는 AOP(Appellation d’Origine Protégée, 원산지 명칭 보호 제도)는 단순한 '지역 표시'가 아니다.
버터의 경우, 젖소의 품종, 먹이 구성, 버터가 만들어지는 환경, 문화·역사적 전통까지 모두 규정한다.
프랑스에는 세 종류의 AOP 버터가 있는데, 바로 이즈니(Isigny), 샤랑트-푸아투(Charentes-Poitou, 에쉬레 지역), 브레스(Bresse)이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이즈니 버터와 에쉬레 버터는 브랜드이기 전에, 각 버터가 생산되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버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보르디에 버터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 없겠다.
메종 보르디에의 창업자이자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버터 명장으로 불리는 장이브 보르디에.
그의 아버지는 치즈 장인, 외조부는 버터 장인이었다.
파리의 한 시장에서 아버지의 치즈와 할아버지의 버터를 팔던 보르디에는 1980년대에 상말로(St Malo)에서 전통방식으로 버터를 생산하던 공방을 넘겨받았다.
이곳에서 시작한 그의 수제버터에 담긴 비밀은 단순하다.
"시간"과 "손".
보르디에는 AOP 지역에서 나온 최상급 크뤼·발효 버터를 가져와 전통 방식대로 손으로 눌러 결을 만들고, 소금과 함께 치대어 천천히 간이 배이도록 한다.
여기에 해조류, 바질, 고추, 유자 등을 추가하면 보르디에의 시그니처인 가미 버터가 만들어진다.
보르디에 가미 버터의 시초인 해초버터를 처음 먹었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
서로 밀어낼 것만 같은 해초와 버터 두 재료가 고루 섞여 폭발시키는 감칠맛에 눈이 깜짝 떠질 정도였다.
요즘은 비교적 신상인 훈제소금과 메밀맛 보르디에 버터를 좋아한다.
버터빨로 바게뜨 하나를 순삭하고도 아쉬워 버터만 톡 잘라 입에 털어 넣곤 한다.
선수급 베이킹 실력을 갖춘 한 미국인 친구는 미국에 갈 때마다 다른 건 몰라도 버터는 꼭 사간다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만들어 주고 싶은데 미국에서 사는 버터로는 아무리 해도 맛이 안난다는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아직 프랑스 버터에 깊이 빠지기 전이라 솔직히 유난이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내가 그보다 더 유난떨게 될 줄은 모르고 말이다.
이제는 프랑스 밖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기본으로 세 종류의 버터를 챙긴다.
요리나 베이킹용으로 쓸 가성비 버터, 생으로 발라먹을 좋은 가염 버터, 특별한 날에 먹을 보르디에 버터.
이런 버터를 선물하거나, 프랑스 버터로 만든 음식을 대접할 때면 내가 애정하는 프랑스 식문화의 한 조각을 나누는 듯 해 기분이 좋아진다.
프랑스에서 버터는 분명 단순히 '지방'이 아니라 미식의 영역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프랑스 버터에 입문해 보고 싶은 생각해 들었다면, 망설이지 마시길.
이제는 냉장고 문 안쪽이 아닌, 식탁의 중심에서 버터와 만나보시길 바란다.
<빠리냠냠 레시피> 프랑스 학교에서 먹는 하디 브어 (radis beurre)
언젠가 아이들 학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이날 전식으로 나온 것이 하디(방울무)와 버터.
작은손으로 생 방울무 꼭지를 잡고 나이프로 버터를 발라 입으로 쏙 넣는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프랑스 친구집에 초대받아 가면 식전에 흔히 내어 놓는 하디 브어.
의외이지만 먹어봐야 아는 꿀조합이다.
아삭하고 신선한 방울무와 크리미한 버터의 대조가 단순하지만 기분 좋은 맛을 낸다.
이 때 버터는 굵은 소금이 들어간 가염버터가 좋다.
버터가 방울무에 남아있는 약간의 알싸함을 중화시켜주니 먹기 편안하고, 간간히 소금이 씹혀지니 간이 잘 된 요리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