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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필 Mar 14. 2024

포켓몬 카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프랑스 초등학교에서 포켓몬 카드를 꺼내면 생기는 일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작은 것이었다.


아빠가 출장을 간 동안 아이들은 안방 침대에 한 자리씩 차지했고, 

타이거와 엘리가 서로 엄마 옆에 눕겠다고 투닥거리고, 

그 사이에 끼어서 자고 싶지 않았던 엄마가 엘리, 타이거, 엄마 순으로 눕자고 제안한 것. 

그게 다였다.


갑자기 엘리가 폭풍 오열을 시작한다. 

“오늘 학교에서도 나랑 아무도 안 놀아줬는데, 엄마도 내 옆에 있기 싫다고 하는 거야?” 라며 가슴이 벌렁거리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른 밤이었지만 유난히 피곤한 날이라 가수면 상태였는데, 잠이 확 깨며 심장이 뛴다. 

아이를 옆으로 불러와 손을 잡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본다.


루이즈와 사라는 둘이서만 노는 중이라고 안된다고 했고, 

마리우스와 쥘은 공룡 놀이만 하는데 엘리더러 너는 아직 어려 잘 모른다고 했단다. 

마들렌도, 또 누구도, 누구도, 다 제인이랑 안 논다고 해서 엘리 혼자 구석에서 있었다니.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가슴이 베이는 듯 아프다. 


그런데 그 아래 한 겹의 이야기가 더 있었다.


모하메드, 다라, 악셀이 엘리한테 '너는 나쁜 애'라고 못된 말을 하며 같이 놀지 않겠다고 했단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이유를 물으니 "내가 악셀이 포켓몬 카드를 꺼낸 것을 신고해서"란다. 


학교에서 누군가 포켓몬 카드를 꺼내는 게 보이면 선생님께 말을 하라는 공지가 있었나 보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엘리는 포켓몬 카드를 보자 "그 카드 꺼내면 안 되니까 집어넣으라"라고 말했고, 카드 주인이 말을 듣지 않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선생님께 신고를 했다.

결국 포켓몬 카드는 압수당했고, 학년이 끝날 때가 되어야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엘리는 자기는 옳은 일을 했는데 왜 자기가 나쁜 아이가 된 거냐며 억울함과 답답함을 온몸으로 토해낸다. 

"그래, 그래, 이거 참 어려운 일이다.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 너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화나고 속상한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내일 만약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지켜야 하니 자기는 친구들이 또다시 비난하더라도 여전히 신고를 하겠단다. 

이 정의감과 투철한 신고정신은 어디서 온 걸까. 세상 최고 쫄보인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를 토닥여 재우고, 새벽 내내 깊은 생각에 빠졌다.

본인의 신념을 지키는 것도, 타인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다. 


학교에서 공부, 선생님도 아닌 친구들과의 관계가 유난히 어려웠던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엘리가 다른 것보다 사회성 좋은 아이로 크기만을 바라왔다. 

본인의 평안을 지키며, 남에게 휘둘리지도 남을 휘두르지도 않는, 집단에 조화롭게 어울리는 아이. 

그것만을 바라왔는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참으로 힘들다.


엘리에게 이 일의 최대한 다양한 면들을 이야기해 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그 뒤에 회색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 친구들의 행동에서 잘못된 부분과 그래도 이해가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등등. 

해답은 없지만 그녀의 생각 주머니가 커지길 바라며.


그리고 제안했다. “우리 이걸 선생님께 여쭈어보면 어떨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여쭤 보는 거야.”

선생님에게 엘리에게 있었던 일을 알리고 싶은 마음과, 선생님의 지혜를 청하고 싶은 속마음이었다. 

다행히 엘리도 좋다고 하니, 다음과 같이 아이의 말을 받아 적었다.


Bonjour Maîtresse, (선생님 안녕하세요,)

C'est Elle-Jane. J'ai une question. (저 엘제인이에요. 질문이 하나 있어요)

Vendredi, mes copains ne voulaient pas jouer avec moi et c'était Axel, Mohamed et Dara.
(금요일에 악셀, 모하메드, 다라가 저랑 놀기 싫다고 했어요)

Parceque je l'ai dit à Pascale que ils ont ramené les cartes Pokémon. (제가 파스칼 선생님께 걔네가 포켓몬카드 가져온 걸 얘기했거든요)

Moi je pense que c'est bien d'écouter la maîtresse mais ils étaient en colère contre moi. (저는 선생님 말을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저한테 화가 났어요.)

La prochaine fois qu'il y a la même chose, que dois je faire ? (다음에 같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Merci maîtresse ! (감사합니다 선생님!)

Elle-Jane (엘제인 드림)


아이를 방으로 보내고 나는 추신으로 메일을 보내게 된 상황을 간단히 덧붙인 후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 날, 선생님께 답장이 왔다.

엘리를 불러 네가 한 행동은 옳다고 재확인해주었고, 

남자아이들은 따로 불러 금요일 사건의 모든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닌 너희에게 있었던 것이라 일러주었고,

반 전체에게 dénoncer(고발)와 rapporter(신고)의 차이를 다시 설명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지원까지 받은 엘리는 득의양양하다.

약간의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았지만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이 났다. 

이튿날 학교 앞에서 포켓몬 보이즈들을 만났는데, 엘리와 서로 밝게 인사하고 장난치는 걸 보니 아이들 싸움은 물 베기인가 싶기도.


앞으로 이런 일은 또다시 찾아오겠지.

그리고 세상에는 똑 떨어지는 해답이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이 훨씬 더 많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미래를 대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언제라도 엘리가 본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하는 엄마'보다는 '듣는 엄마'가 되는 것. 

또한 엘리의 높은 인정욕구는 내 것과 더불어 조절을 배워야 하는 부분이겠다.

세상에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우리 함께 배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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