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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종찬 Nov 29. 2020

무식하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

The necessity of incompleteness

질서와 혼돈

랜덤성, 예측불가능성, 불확실성, 우연성, 혼돈, 놀라움과 같은 무질서함은 삶의 필연적인 일부다. 당장 내일 차사고가 날지, 집값이 오를지, 주가는 오를지, 다음 주에 눈이 내릴지, 무엇을 공부해야 미래에 더 나은 수익을 창출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이러한 불확실성을 확실성의 영역으로 옮기려 하더라도, 우리는 인생이 끊임없는 “모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우연성은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예측불가능성은 예측가능함으로, 불확실성은 확실함으로, 놀라움은 기댓값으로, 혼돈은 질서로 바꾸려는 시도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예측할 수 없는 야생동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혼돈의 자연에서 질서의 인간사회로 생존을 위해 변화해갔을 것이다. 결국 생존을 위해 리스크를 줄이는 선택이 수만 년간 지속되어온 방법처럼 보인다.


결정론의 오류

17세기 아이작 뉴튼과 물리학자들이 수학적 질서를 통해 만물을 정립하려 했고, 18세기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경제적 질서를 찾고자 했던 것처럼, 인류는 끊임없이 혼돈을 이해할 수 있는 질서로 바꾸는 시도를 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검증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로서, 예측할 수 없는 놀라움(surprises)과 기적(miracles)을 제거하는 방법, 또는 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론적(deterministic) 물리학으론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정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변화는 그 자체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을 통한 놀라움이자 기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모래사장에 데려가면 모래성 정도는 지을 수 있겠지만, 엔지니어는 모래에서 실리콘을 뽑아내고 8대 공정을 거쳐 반도체를 만들어낸다. 즉 모래성에서 반도체까지의 결과물은 순전히 지식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과학은 변화 (change)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줄지는 몰라도, 그 변화의 주체 (agent of the change)를 설명하진 못한다. 변화의 주체는 새로운 정보의 고안자이며, 경제학에서 이들은 기업가 (entrepreneurs)라고 불린다. 이들은 부싯돌을 처음 사용했고, 바퀴와 지렛대를 고안했으며, 전기와 철도를 발명하고, 전화기와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휘발유로 고래기름을 대체하고, 전기로 등유 산업을 없앴으며, 자동차로 마차 산업을 무너뜨리고 또다시 역사 속 잠깐 존재하는 수백조짜리 변화를 탄생시킨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 인류의 차이는 순전히 사람의 지식에 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원소로 구성된 지구에서 살며, 동일한 자원을 가졌지만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한 삶을 산다. 수만 년 간 인류는 목숨을 담보로 끊임없는 탐험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고, 그 정보는 지식으로 축적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다. 새로운 정보는 과학과 통계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결정론적 (deterministic) 실험의 결과가 아니다. 새로운 정보는 항상 놀랍고(surprisal) 예측 불가능하며, 실수와 실패, 낭비를 동반하고 대부분 우연히 탄생한다.


불균형과 안티프래질리티

조지 길더는 지식과 힘 (Knowledge and power)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세상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대로 “위대한 기계” (a great machine)처럼 구동되지 않는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의 균형(equlibrium)을 이루고, 분업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 탐험과 실험, 실패와 우연함을 통해 끊임없이 파괴되고 다시 창발 하는 불균형(disequilibrium)의 연속이다. 균형과 효율을 찾고 관여할수록 시스템은 더욱 약해진다.


말을 키우는 사람들, 수많은 말의 먹이를 책임지는 농부와 넓은 목초지, 그 목초지를 경작하는 노동자와 말의 상태를 살피는 수의사, 마차를 모는 마부와 마차를 제작하는 목수 등, 끝없이 이어지는 마차 산업 생태계 사슬의 균형과 효율은 헨리 포드의 발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조 원대 매출을 올리던 핸드폰 회사들과 MP3, PMP, 전자사전 제조사와 그 밑의 수많은 하청업체들의 생태계는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에 의해 무참히 파괴됐다. 세상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파괴적 변화를 끊임없이 겪어왔음에도 (혁신적 기술의 등장이든, 블랙스완이든), 학계를 중심으로 균형과 결정론, 질서에 매달린다.


구글은 야후와 빙을 무참히 짓밟고 검색시장을 독점했고, 아마존은 북미 이커머스 산업을 지배한다. 어느 누구도 이들의 영역을 더 이상 침범하지 않는다. 제로 투 원 (Zero to one)의 저자인 피터 티엘은 이들이 사업을 다각화하고 기술기업이라는 더 광범위한 포장지로 가려 독점의 위치를 흐릿하게 한다고 한다. 검색에서 완전 독점을 하는 구글이 소셜 네트워크 산업에 진입하고 페이스북과 경쟁하면, 구글은 더 이상 독점기업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즉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완전히 독점한 검색시장에 균형이란 없다. 이들은 극단의 불균형을 유지하다 새로운 파동에 의해 무너지거나,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생존할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그의 책 “안티프래질” (Anti-fragile)에서, “부서지기 쉬운”을 뜻하는 프래질(fragile)의 반대말은 회복성(resilience)이나 강건성(robustness)이 아니라 안티프래질(anti-fragile)이라고 말한다. 프래질 시스템은 충격에 쉽게 무너지고, 강건한 시스템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충격까지는 버티지만, 안티프래질 시스템은 오히려 충격과 변동성 속에서 더욱 강해진다고 말한다.  


프래질 시스템은 효율성에 최적화되어있고, 낭비와 반복, 스트레스를 피하고, 앞서 계획하며, 기존의 지식과 예측에 의존한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정보, 즉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대비할 수 없다. 안티프래질한 시스템은 다양한 결과에 노출되어있고, 예측 범위 내의 정보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 즉 발견은 질서보다 무질서의 영역이고, 새로운 정보는 불확실성과 기습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새로운 정보는 “상향식”일 때 스스로를 드러낸다. 예전에 70년대 초 올림픽 체조와 지금의 체조를 비교한 영상을 본적이 있다. 체조선수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근육과 골밀도, 체형 등 모든 부분에서 거의 동일할 테지만, 현재 체조선수들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동작을 해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동작 (무질서)을 시도하고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와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견디면서 성장한 것이다. 기업가들 역시 이러한 상향식 사고관이 알지 못했던 정보를 가져오고 혁신적 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나심 탈레브는 무질서의 영역, 즉 불확실성, 다양성, 불완전한 지식, 우연, 혼란, 가변성, 엔트로피, 시간, 미지의 것, 무작위성, 동요, 스트레스, 오차, 결과의 분산, 지식의 결여가 안티프래질 시스템을 만들고  안티프래질 시스템은 그 어느 체계보다 월등하다고 말한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은 지구 상에서 가장 실패하기 좋은 기업”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패는 결국 무질서의 탐험을 뜻한다. 프래질한 시스템은 실수(실패)를 싫어하고, 강건한 시스템은 실수를 단순히 정보로 받아들이지만, 안티프래질 시스템은 실수를 “사랑”한다.


신호와 소음

우리는 약간의 소음이 있을 때 더 잘 집중한다. 이를 백색소음 (white noise)라고 한다. 나심 탈레브는 이를 과잉보상의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치 소음에 대항해 집중력을 연마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관점 (정보이론)에서 보면 소음은 신호를 보내는데 필연적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통신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선 신호를 키우고, 소음을 줄이는 게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소음을 정보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간극을 외면하기보다 똑바로 바라보고 이용해야 한다.


불완전의 필요성

상상은 지식을 선행하고 이론은 증명을 선행한다. 상상 없이는 지식이 존재할 수 없고, 이론 없이는 증명도 없다. 세상은 결정적이거나 완성적이지 않으며,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다. 수학자 쿠르트 괴델은 “모든 논리적 시스템은 확실하게 불완전 (incomplete)하고, 동시에 외생적 (exogeneous) 또는 외부의 원리(outside axioms)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완전해진다”는 수학의 불완전성을 입증했다. 앨런 튜링 역시 결정적 컴퓨팅 기계 (deterministic computing machine)는 오라클 (외부의 정보제공자)을 통해야만 비결정적인 도약을 하고 그 오라클은 기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 탐험을 통해 탄생한 비결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우연히 습득한 정보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는 세상을 불균형의 연속으로 이끌어 안티프래질 하게 만든다. 기댓값에서 벗어난 무질서한 상상력과 불완전한 영감이야 말로 새로운 경제의 엔진이다. 예상밖의 결과를 위해 더 많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낭비하는 것, 그것이 나 개인과, 내가 속한 회사, 인류의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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