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2h 동안의 샌프란시스코 표류기
웰컴 투 더 스테이츠, 맨
미국 입국을 앞두고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입국 심사대에서 깐깐한 심사 때문에 곤혹을 치른 후기들, 출국 전 항공사 지상직 승무원의 불친절한 충고 때문이었을까? 교환학생 입학 허가증도, ESTA(전자여행허가서)도 있음에도 왜 당당하지 못했을까. 아마 공항의 낯선 공기와 분위기가 만들어낸 불편함 때문이었을지도. 왜냐, 이내 입국심사관의 "굿모닝"이라는 익숙한 영어 인사와 함께 바로 움츠렸던 어깨가 풀어졌기 때문이다.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마치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민수와 지토가 인사를 나누고,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듯, 짧은 몇 마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심사는 끝나 있었다. '미국도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이 들 찰나, 이내 스쳐가는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2시간 레이오버 동안 도심 투어를 할까 하여 공항 내 물품 보관소를 찾아갔고, 뚱뚱한 캐리어 두 개 보관하는 데에만 70불 넘는 돈을 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부리나케 공항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대안 탐색에 들어갔고, 도심 내 한인 민박에서 제공하는 짐 보관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70불을 보고 나서 20불을 보니 너무나도 감사히 느껴졌기에. 각각 23kg에 육박하는 캐리어들을 양손에 꼭 쥐고 당당히 바트(BART)에 올라타 부푼 마음을 이끌고 그렇게 시내로 향했다.
자본주의는 늘 우리에게 말한다, 돈이 없으면 몸이 고생한다고.
인 앤 아웃에서 먹은 더블 치즈버거를 유일한 에너지원으로 삼아, 분주하게 피셔맨즈 와프 부근을 탐험했다. 언덕 길들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붙어있는 집들은 사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수국이 가득 핀 롬바드 스트릿에선 중국인들 사이를 비집고 공간을 창출해내 인증샷을 남겨왔다. 그렇게 관광지를 하나둘씩 클리어 했고, 남은 것은 금문교 야경 일정뿐이었다.
잠깐 머물다가 바로 떠날 즉흥여행이었기에, 유심칩을 구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구글 오프라인 지도에 의존한 채 돌아다녔고, 방향과 현재 위치 외엔 어떠한 지형적 정보도 얻기 힘든 채로 살았다. 피셔맨즈 와프에서 어떻게 금문교까지 갈 수 있을지 몰랐기에,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트램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의 유무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우버를 타던가, 아니면 지금부터 걸어가도 충분해"였고, 현지인처럼 보였기에 나는 그 말을 철석 같이 믿었다. 우버 타기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걷기 시작했다. 걷고 있는 해안길의 경치가 너무 좋아 걸음걸음마다 사진을 남겼던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많이 걷는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어떤 길을 걷든 여행에서는 그마저도 의미 있는 것이라는 환상 속에 빠져 사는 몽상가적 기질이 있기에.
지도에 찍어둔 포트 포인트에 도착하니 주변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금문교는 조명으로 더욱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곳에서만 사진을 100장은 찍었을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 찰나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그날따라 유독 심하게 낀 안개 탓인지 주변은 더욱 빠르게 어두워져 갔고, 10분을 걸었더니 민가 하나 없는 깜깜한 허허벌판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날 뉴스 헤드라인을 통해 부모님께 안부를 전할 것 같아서 우버를 켰다. 민가 하나 없는 곳에 와이파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돈 몇 푼 아끼자고 유심칩 사지 않은 나 자신을 고문하고 싶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하려 했다. 때마침 주차된 차 한 대를 발견했고 주변으로 사람들의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중국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이 영어든 중국어든 나는 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나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이름 모를 중국인 친구는 내게 핫스팟을 열어주었다. 내게 천국의 신호가 전달되자마자 우버 앱을 켰고, 운임비를 확인할 틈도 없이 냅다 불렀다. 아마 그때만큼 우버의 존재에 대해 감사해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를 구해준 중국인 친구도.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공항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우며 다른 경유지인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20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