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은기 Nov 15. 2017

그림쟁이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소위 그림쟁이라 불리웠다.

그것도 예술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천 위에 찍어넣을 무늬를 디자인하는 '도안사'였다.

아버지가 그 일을 하셨을 당시에는 그렇게 말했다. 요즘 말로 하면 '텍스타일디자이너'쯤 될것같다.


아버지는 경상북도 울진 깊은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대구로 나가서 그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한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아버지는 어렸을때부터 그림을 비롯한 다방면에 소질이 많았다고 했다.


나중에 엄마와 결혼하신 이후에도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그 일을 계속하셨지만, 정작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솔직히 가족들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직업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때였고,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는 대부분 작은 개인사업체 였던데다, 그나마도 몇달치 월급을 주지 않다가 문을 닫아버리는 상황이 이어졌고, 아버지는 다시 동종 회사로 이직을 반복했다. 당연히 가족의 생계는 더욱더 어려워 졌고, 거기다 장남이라는 부담때문에 아들을 낳기위해 줄줄이 딸을 계속 낳을 수밖에 없어 부양할 가족은 자꾸만 늘어났으며, 나는 그 줄줄이 태어난 딸들 중 네째였다.





내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상들 중에는, 아버지가 휴일에도 집에 일거리를 가져와서 일을 하시고, 나는 그옆에 붙어앉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는 아크릴 같은 투명한 필름 위에 작은 보자기에 싸인 정체모를 하얀 가루를 톡톡 묻힌 다음 그위에 작은 붓펜 같은 것으로 밑그림을 그리셨는데, 필름위에 그냥 그림을 그리면 물감이 방울방울 모이기 때문에 표면장력을 없애고자 가루를 뿌린 것을 나중에 학교에서 배운 후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내가 옆에서 구경하는 것을 흐믓해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신을 닮아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네째딸을 대견해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미술시간을 좋아했고 주변에서도 그림을 잘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한때 미술가가 되기를 꿈꿨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사춘기를 방황했으나, 어쩌면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나 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거친 파도위를 힘차게 나아가는 범선의 모습이 기개로워 보인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친정에 갔던 나에게 아버지가 무언가를 건네주셨던 적이 있다.

얇은 습자지 같은 종이위에 연필로 그려진 어린아이의 그림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내가 6살때쯤 그린 그림이라며 나에게 주셨다.

그림 속에는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주인공들인 네로, 아로아, 그리고 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수십년이나 지난 그림을 간직하고 계셨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방금 노트에서 찟어낸 종이처럼 깨끗하게 보존된 것을 보고 더욱 놀라웠고, 조금은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몇개 안되는 물건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그림을 잘 보관하지 못했다. 버리진 않았는데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나질않아, 시간이 되면 한번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엄마는 항상 그러셨다.

'한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열식구를 먹여살려도, 열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은 한식구도 못먹여 살린다'고.

생활고에 허덕이며 사는 엄마를 지켜봐온 나로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많은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또 나약하기까지 한 아버지 때문에 오랜기간 많이 힘드셨던 것이다.


몇해 전 친정에 가니 엄마가 아버지 그림 중 남아있는 것이라며 나와 자매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네가 가져가라'고 하시며 나에게 주었는데, 아마 내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니 아버지가 그걸 나에게 주기를 원했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위의 그림들이 그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을 보면서, 옛날 어린시절 아버지 옆에서 작업을 구경하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비록 값나가는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고흐의 작품보다도 근사해 보인다.


아버지는 이런 그림들을 비록 생계를 위해 그리셨지만, 그 일을 싫어하시진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넘쳐나는 재능을 그 그림에 담으셨을 것이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가끔씩 아버지가 생각난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피아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