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곧음을 강요한다. “네가 뭐가 못나서 굽혀. 죽을지언정 굽히지는 마라.”라는 사람도 있다. 곧음이 멋있고 강함이며, 굽힘은 자존심에 상처 나고 약함이라고 생각한다.
굽힘이나 휘어짐은 자존심에 상처 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오히려 굽힘에는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사할 때 허리를 굽힌다. 절할 때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는다. 타협은 최선의 공격, 방어기술이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협상을 통해 타협할 수 있다. 절대 내 이익은 포기할 수 없고 그럴 바에는 죽겠다는 사람과 협상할 수 없다. 자기만 존중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다.
곧음이 굽힘과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해진다. 곧기만 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머리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경우 목 근육과 허리 근육이 뭉쳐서 통증이 온다.
강자에게 곧은 마음으로, 약자에게는 겸손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대한다. 거꾸로 하기 쉽다. 사장이 목 뻣뻣이 세워 직원들이 다가가기 부담스럽다. 나만 존중하는 자존심을 제쳐 놓고 서로 존중하는 타협을 붙잡는다. 타협과 굽힘으로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실익을 취한다.
916년 거란의 아율아보기는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제국(이후, 요나라)을 세웠다. 이 시기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여 5대 10국의 혼란한 시기였다. 아율아보기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배후 주변국들을 쳤으며, 발해도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중국 대륙의 송, 한반도의 고려, 만주지역의 요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 요는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고려를 침공했다. 호락호락한 고려가 아니었다.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요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1차 서희의 외교 담판, 2차 양규의 거란군 후방 공격, 3차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다. 그중 서희의 외교 담판이 싸움의 최고기술에 해당한다.
993년 거란이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은 거칠게 없었다. 고려의 보주, 천마, 봉산성을 연이어 함락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고려의 군대는 중앙군 약 5만 명, 주현군 약 30만 명 등 전체 다 합쳐야 대략 40만 내외에 불과했다. 병력 수가 적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냥 투항하자는 의견, 평양 이북을 거란에게 넘겨주자는 의견, 일단 싸우고 의논하자는 의견(중군사 서희)이 나왔다. 고려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밀어주었다. “누가 거란과 외교 담판하여 만세의 공을 세우겠는가?” 중군사 서희가 대답했다. “폐하!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서희 장군 일행은 국서를 지니고 담담하게 거란 군영으로 갔다. 거란의 소손녕 장군은 서희 장군에게 자기는 큰 나라 조정에서 온 귀인이므로 뜰에서 절하라고 했다. 서희 장군은 양국 대신끼리의 예법이 아니라고 소손녕 장군에게 몇 번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희 장군은 숙소로 돌아가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 장군은 결국 받아들이고 마루에서 서로 예를 행했다.
소손녕 장군은 고려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는 신라 이후 세워졌는데 고려 영토가 거란 땅을 침범하고 있다. 또한, 거란과 맞닿아 있는데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땅을 내놓고, 요 조정의 조회에 고려 임금이 들어오도록 하라(입조入朝).”
서희 장군은 소손녕 장군에게 국토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방어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요. 그래서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소. 고구려의 땅의 경계를 논하자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역인데 어찌 침범했다고 할 수 있겠소?”
서희 장군은 거란의 소손녕 장군에게 입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방어했다. “여진 때문에 입조를 못하고 있소. 여진을 쫓아내고 고려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길을 뚫는다면 감히 입조를 하지 않겠소?”
서희 장군은 거란의 침략 이유와 협상 지점을 꿰뚫고 보고 있었다. 거란은 고려를 지배하기 위해 침략한 게 아니었다. 외교전략의 일환이었다. 송나라를 점령하기 위하여 주변국인 고려와 여진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싸움이 길어지면 송과 여진족의 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 고려가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여 거란도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지 이길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서희 장군과 소손녕 장군은 협상했다. 소손녕 장군은 협상 후 거란 조정에 협상 내용을 보고하고, 화해를 맺으라는 회답을 받았다.
거란은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이익이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 전쟁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고려왕의 입조, 거란 연호 사용이라는 명분을 얻었고 고려, 송과 여진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했다. 고려가 송과 외교관계 단절하여 고려와 송을 견제하고, 여진과 맞서게 해 고려와 여진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서희 장군은 고려가 약자라는 현실을 인정했다. 고려의 중앙군 5만 명, 주현군 약 30만 명이나 거란군은 80만 대군이었다. 약자인데 머리 뻣뻣이 세우다가 전쟁에서 패하면 전쟁의 피해는 커지고, 속국으로 전락한다. 서희 장군은 현실적으로 상황 판단하여 싸우지 않는 협상을 택했다. 고려는 전쟁비용을 최소화했고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는 거란과 화약을 맺어 태조 왕건의 고구려 옛 영토 회복 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고려는 요의 약조와 달리 거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송과 비공식적으로 계속 교류했다.
서희 장군은 거란 군영에서 7일을 머물고 소손녕이 준 낙타, 말, 양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 성종은 너무 기뻐하며 강나루로 나가 서희 장군을 맞이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싸워서 초토화시키는 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판타지 소설같은 이야기이다. 전쟁의 현실은 이긴 자나 진 자에게 잔인하고 슬프다. 특히 고려는 약자이고, 고려 영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수비해야 하는 입장이다. 약자가 전면전을 하여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등이 찔려 죽고 국토 황폐화되어 굶어 죽는 경우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약자가 공동체의 이익과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경우 굽힘과 타협이 온전해지는 방법이며,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낫다. 서로 존중해야 가능한 굽힘과 타협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거둔다. 타협은 공격과 수비의 최고 기술이다.
약자가 추세나 흐름의 방향을 잘 못 읽고 머리 뻣뻣이 세우다가 루이 16세처럼 부러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