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천둥소리가 창문을 흔들었고, 창문이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내 눈이 저절로 떠졌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로 밤과 낮이 뒤섞인 생활을 한 지 1년이 되어가면서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누워있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눈을 떴지만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의지가 없었다. 미래는 흐릿했고, 몸은 굳었으며, 깨어 있는 동안의 마음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식은 밥을 데워 겨우 삼키고 나서야 현관문을 나섰다.
밤새 비 맞고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인도에는 빗물에 푹 절여져 흐무러진 잎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플라타너스 가지에 붙어 있던 잎이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바닥에 기생하던 이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잎을 쓸어 담은 포대 자루가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담처럼 쌓여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기대어 누워 플라타너스 우듬지를 올려다보며 간간이 내리는 빗방울이 내 눈까지 떨어지는 궤적을 따라가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차도, 사람도 없는 길에서 나는 일부러 자전거를 지그재그에 가깝도록 삐뚤빼뚤하게 운전했다. 비둘기 한 쌍이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동의 젖은 땅바닥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대고 있었다. 아마도 간밤에 취객이 뱉어놓은 토사물이거나 빗물에 녹아든 미네랄이거나 내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자전거 바퀴가 비둘기의 귓전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은근히 개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었고 자존심까지 상한다고 느꼈다.
“저것들이 그냥, 확 밟아 버릴까 보다.”
나는 한순간 아주 작고 어두운 충동을 느꼈는데, 그 감정은 하루 종일 내 마음속에서 모양을 바꾸어 가며 커갔다.
드림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이미 쓰고 내어놓은 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채용공고를 찾아봤지만 나에게 맞는 자리는 없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며칠 전에 ‘한번 해보기나 하자. 안 되면 말고.’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며칠간 고민하고 공들여서 채용 서류의 빈칸을 채워놓았다. 오늘은 최종 확인을 하고 이메일로 제출할 요량이었다. 사실은 내가 마감일이 되도록 서류를 보내지 못하고 머뭇거린 것은 내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오십 평생 수없이 좌절했던 경험 때문인지, 둘 다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1층에 내려가 공용 PC실에서 서류를 출력해서 ‘위의 사실이 틀림이 없다’는 의미로 서명한 뒤 스캔 파일로 만들어서 제출해야 한다. 두 대의 복합기가 있는데, 오른쪽 복합기에는 ‘스캔은 USB만 가능. 문의는 안내데스크로’라고 A4용지에 써서 붙어 있었다. 나는 1시간 동안 예약한 PC에서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왼쪽 복합기를 선택해서 신용카드로 요금을 결제하고, 복합기의 메뉴창에서 스캔 목적지를 ‘PC’로 선택했다. 그러자
“어라, 안되네. 왜 이러지?”
반응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안내데스크에 가서 일러바쳤다. 머리가 희끗한 여자는 ‘운영하는 업체에 전화해 보세요. 우리는 몰라요.’ 퉁명스럽고 능숙하게 내뱉었다. 옆에 있던 남자와 나의 눈길이 유리 칸막이를 통과해 서로 마주쳤다. 남자는 안내데스크 바깥으로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 잘 아시겠지만 저희는 기술적인 걸 잘 모릅니다. 복합기는 외주업체에서 설치하고 운영하는 것이어서 그쪽에 물어보셔야 합니다. 전화번호는 복합기에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안내데스크에 물어보라고 써놓은 건가요? 복합기 두 대에 모두 써 붙이든지....”
“죄송합니다. 저희는 잘 모릅니다. 업체에 전화해 보세요.”
갑자기 빠르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눈치챘다. 여자와 남자가 하는 말투와 말속도가 비슷한 데다 남자가 돌아가는 동작이 너무 단호하고 숙련되어서 내 몸속 어딘가에서 화산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확, 죽여버릴까 보다.’ 나는 큰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내뱉고 나서야 ‘오늘이 채용서류 제출 마감일이다. 얼른 USB를 구해서 제출하는 게 급하다.’는 생각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근처 다이소로 뛰어갔다. 나이 든 여직원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USB는 재고가 없네요.”
다시 근처의 아트박스로 향해 뛰었다. 젊은 여직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USB는 저쪽에 있어요.”
아무리 훑어봐도 USB 변환 젠더만 잔뜩 있다. ‘젠더는 아닌데....’혹시나 내가 잘 못 알고 있나 해서(그렇기를 바라면서) 젠더 제조업체에 전화했다.
“젠더의 모델명이 이러한데, 혹시 데이터 저장 기능이 있을까요?”
“없어요. 그냥 전송만 하는 어댑터인데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서 흐느적거릴 것만 같았지만 겨우 버텼다. ‘이것들이 장난하나, 싹 다 없애버릴까 보다.’ 내장 속 깊은 곳에서 두 번의 살인 욕구를 느꼈으므로 나는 이미 네 명을 죽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부터 나는 킬러다.’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알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제법 큰 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이기 참 쉽다. 걸리기만 해 봐, 다 죽는 수가 있어.”
서류 제출은 물 건너갔다고 포기하는 순간 배고픔이 몰려왔다. ‘식빵 3300’이라는 간판에 이끌려 들어간 집에서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치즈 때문에 불쾌해하면서 목구멍으로 밀어 넘기면서 ‘또 죽일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었다가 사라졌다. ‘USB도 구하지 못하고 빵도 맛없는 걸 골랐어.’ 내가 죽고 싶은 것인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도서관에 돌아왔을 때, 나는 다 포기하고 복합기 운영업체에 전화했다. 전화받는 여자는 의외로 쉽게, 순순히,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요금 결제는 취소해 드릴게요. 복합기 메뉴에서도 PC 버튼을 삭제할게요. 안내문도 하나 더 붙여둘게요. 됐죠?”
나는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는 한꺼번에 모든 걸 해소해 주었다. 나는 며칠간의 욕심을 버리듯 체념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손해가 없으면 됐지. 아휴,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남자가 옆에서 나를 쭉 지켜보고 있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보다 열 살 쯤이나 많아 보였는데 종일 도서관 공용 PC 앞에 앉아 있는 눈치였다.
“USB 때문에 그러지요? 빌려드릴게.”
나는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의심의 찰나를 건너뛰고, 그가 내미는 USB를 냉큼 받아 들고 바삐 움직였다. 채용 서류를 이메일로 보냈다. 나는 USB를 돌려주며 아무런 기대감 없이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비도 오는데 나가서 막걸리 한 잔 하실래요? 제가 사지요.”
나는 외투 앞섶에 묻은 허연 막걸리의 흔적이 빗물에 씻기도록 자전거를 한 손으로 끌고 느릿느릿 걸었다. 반쯤 바람 빠진 바퀴도 힘겨운 듯 천천히 굴렀다. 차도에는 아침에 보았던 부부 중 하나일지 모를 비둘기가 죽어 있었다. 다리와 몸통은 여러 번 자동차 바퀴에 깔린 듯 납작해져 내장은 어디론가 흩어졌는지 빗물에 씻겨 나갔는지 흔적이 없었지만, 대가리와 부리는 그대로 남았는데 한쪽 눈이 떠졌는지 감겼는지 애써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누웠다. 대뇌 해마에서는 바닥에 누운 비둘기의 대가리가 점점 커가고 있었다. 바닥에 두툼한 요를 깔았지만 딱딱하고 차가운 불면이 또 시작되었다. 내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저절로 중얼거려졌다.
“내가 죽인 걸 거야, 아, 어떻게 죽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않아. 킬러가 이러면 안 되는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