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수필

by jeho

한낮의 전철 안은 한가로웠다. 구로역에서 깡마른 노인이 탔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팔뚝에는 흐릿하게 묻어 있는 것이 눈에 띄길래 곁눈질로 초점을 맞추고 보니 일심(一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계로 새긴 게 아니라 한 땀 한 땀 바늘로 쑤셔 넣은 문신이 틀림없었다. 살갗 아래의 잉크가 너무 번져있어서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세포의 노화로 살갗이 늘어져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하튼 흐무러진 문신을 곁눈질하고 있자니 노인의 얼굴이 잠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내 건너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이 되돌아왔다. 노인의 일심(一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과 변치 않겠다고 약속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지탱해 온 하나의 신념이었을까? 그의 젊은 날은 어떠했을까?


나는 팔뚝에 일심(一心)이라고 새긴 또 한 명의 사내가 떠올렸다. 그와의 인연은 어릴 적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베트남에 참전했다. 큰 키는 아니지만 깡마르고 다부진 몸매에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보던 인상이 깊게 남아 있다. 사진 속에는 윗 옷을 벗은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고, 가슴에는 11자로 열을 지어 여섯 개의 총알 자국이 박혀 있었다. 사내는 담배를 문 채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멈춰 있었다. 가슴의 총알 문신에 총을 겨눈 사내의 팔뚝에도 일심(一心)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선명해서 사내가 궁금하지 않았다.


노인도 선명한 젊은 시절이 있었을까? 피냄새로 찍어 바른 문신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의 맹세를 몸에 새긴 것일까? 그게 무슨 사연을 안고 있든, 일심(一心)은 탄탄했던 팔뚝에서 펄떡였다가 허물처럼 변했으며 단단했던 신념과 약속은 주름 사이에 스며들어 희미해졌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때쯤 전철은 한강철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쪽으로 가면서 노인의 얼굴을 흘낏 보았다. 까만 피부에 흰 수염이 제법 있었다. 큰 눈 위에는 눈썹이 짙었다. 총을 든 일심(一心)과 겹치면서 노인의 시선에 닿을까 봐서 갑자기 가슴이 덜컹거렸다. 노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내가 굳이 알 것까지는 없었지만 나는 무엇을 품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내 마음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 찾아야 하는데.... 나도 근육 없는 팔에 문신을 새겨야 하나.... (끝)

작가의 이전글비둘기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