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너무 늦네"
수경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고 혼잣말을 했다. 식탁 위에는 김치찜이 놓여 있었다. 가지런한 돼지갈비 사이로 김치가 색을 내고 있었다. 새로 지은 밥의 뜸이 드는 시간까지 정확히 맞춰 놨지만, 식탁의 온기는 조금씩 식어갔다.
강릉에서 출발한 버스가 저녁 일곱 시 반쯤 사당역에 도착하면 곧장 귀가하겠다고 카톡을 했던 남편은 여덟 시 반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사당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이십 분 거리였다.
한동안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과 휴대폰을 번갈아 보다가 카톡을 보냈다.
‘도착했어? 왜 안 와?’
잠시 후, 메시지 옆의 ‘1’ 표시가 사라졌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여섯 번쯤 울리고 나서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여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대답은 없었다. 수경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꺼져 있었다.
‘왜 꺼져 있지?’
심상치 않은 기분이 서서히 번져왔다.
112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여행 갔다가 온다는 시간에 귀가하지 않았어요. 혹시 사고 신고된 게 있을까요?”
“아직 접수된 사고는 없습니다. 요즘 연말이라 그런 일 많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경찰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 뭘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마리도 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수경은 휴대폰을 뒤져 연락처를 훑어봤다.
남편의 친구들 번호는 없었다. 대신 ‘현태’라는 이름이 눈에 걸렸다.
현태는 일 년 전 골프연습장에서 알게 된 동생이다. 여행업체를 운영하는데 말수가 적지만 눈치가 빠르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야, 수경. 남편이 무슨 지원을 받아 무료여행 갔는데, 온다는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안 왔어.”
“정부 지원으로 간 행사였죠?”
“응, 어디 기관에서 주최했다던데, 자세히는 몰라. 정선 리조트 사진을 보냈었어.”
“그럼 한번 알아볼게요.”
잠시 후 도착한 그의 메시지에는 짧게 쓰여 있었다.
‘김상기 씨, 명단에 없다고 합니다.’
순간, 수경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직접 가보자”라고 제안했다.
서울을 벗어나 정선으로 향하는 도중, 눈이 흩날렸다. 차 안은 조용했다. 수경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고, 졸고 있었던 듯한 직원은 명단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김상기 씨는 없습니다. 대신 저희 명단에 있던 ‘남기현’ 씨가 취소하셨거든요. 그런데 취소 전 인원수대로 맞았는데....”
수경은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 남편이 그곳 객실 사진을 직접 찍어 보냈는데, 이름이 없다니.
담당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일일 아르바이트생이 명단을 정리했는데, 지금은 연락이 안 돼요.”
모호했다. 설명도, 실마리도 없었다.
수경은 어지러웠다. 그가 이끄는 식당으로 갔다.
24시간, 구옥을 개조한 식당, 뜨끈한 온돌, 김이 오르는 장칼국수 냄새.
“조금이라도 먹어요.”
“배는 고픈데... 잘 넘어갈지.”
“힘내야 찾죠.”
구수하고 뜨근한 장칼국수를 반쯤 비우자, 수경은 긴장이 풀리며 눈꺼풀이 무거웠다. 따뜻한 온돌 위로 스르륵 무너졌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수경은 현태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가슴 위에 그의 손이 얹혀 있었다. 놀라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편했다.
‘이게 뭘까, 안도일까, 포기일까.’ 생각이 고요했다. 오래 묵은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수경은 문득 십여 년 전 일을 떠올렸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직접 보았다. 그때의 분노는 불 같았지만, 지금은 아무 감정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었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분노는 무기력으로 바뀌었고, 기대는 체념으로 변했다.
이제는 단지 조용히 숨 쉬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리조트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수경은 커피를 받아 들며,
“오늘은 정동진에 가보려고.”
수경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서울에 일이 있어서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누나, 혼자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고마웠어"
"바다 보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걸요.”
그는 또 연락하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정동진의 바다는 차가웠다. 수경은 동쪽 바다는 언제나 푸르다고 생각했지만 아침바다는 짙푸른 바다였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몰려왔다가 제자리에 돌아갔다.
수경은 바닷가에 서서 생각했다.
‘기다린다는 건, 결국 나를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워지고 가벼웠다.
“너무 늦었어.” 수경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 다시 크게 말했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파도가 찰싹이며 몰려와서 발끝을 적셨다. 수경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로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먼바다를 보는 것과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