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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Nov 09. 2022

내 가족의 고독사

작은 외삼촌을 떠나보낸 날

  최근 몇 년간 사회 문제로 대두된 고독사. 연고도 없이 홀로 외로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말. 고독사에 대한 이야기는 TV를 틀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급격히 대두된 사회 문제라는 시사 프로에서 고독사 현장을 청소해주는 특수 청소부들의 다큐멘터리. 또는 책 '죽은 자의 집 청소' 등 여러 곳에서 고독사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고독사는 남 일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내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고독사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또는 홀로 죽더라도 신변을 잘 정리하고 때가 되었을 때 아름답게 갈 것이라고.

 

  어제저녁 갑자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 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내 몸을 걱정해서 안부전화를 하셨겠거니 짐작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안부전화가 아니었다. 20년간 소식을 모르고 살던 작은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셨다는 전화였다. 일단은 서울대 병원에 시신이 안치되어있고, 큰 외삼촌이 지금 서울로 올라오고 계시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바로 서울대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나는 코로나로 인해 격리 중이라 따라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제가 격리 마지막 날이었고, 오늘부터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에 아침 일찍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 작은 외삼촌은 대부분 삼촌들이 그렇듯이 어머니가 잘 안 사주는 군것질 거리를 사준다거나 오토바이를 태워주는 재밌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촌은 그 당시에 흔치 않은 컴퓨터 전문가였다. 실제 직업이 컴퓨터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고, 취미로 계속해서 컴퓨터 부품을 사모으고 관련 공부들을 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우리 집에 삼촌이 쓰던 286 컴퓨터를 싹 정비해서 물려주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부모님의 부탁으로 삼촌이 직접 용산 전자 상가에 방문해서 컴퓨터를 조립해서 맞춰다 주었다. 그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은 사양으로 맞춰왔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나에게 게임만 하지 말고 인터넷이란 무엇이며 그 용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것들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공부해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게임 삼매경이어서 그런 얘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컴퓨터에 빠삭한 삼촌 덕에 다른 친구들보다는 컴퓨터 전반에 대해서 조금은 더 관심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작은 외삼촌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래도 1년에 몇 번은 봐오던 삼촌이기에 왜 볼 수 없는지 궁금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말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연락을 모두 끊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게 작은 외삼촌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약 15~6년쯤 뒤, 큰 외삼촌이 서울에 잠시 올라오셨다. 오랜만에 뵙고 식사를 대접해드렸다. 큰 외삼촌이 서울에 올라오신 이유는 작은 외삼촌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작은 외삼촌은 주민등록도 말소되었고 휴대폰도 스스로 없애버린 바람에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심지어는 조사원까지 고용해서 찾다가 마침내 서울 성수동 근방에 산다는 단서를 잡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가서 찾아보려 한다 하셨다. 하지만 결국에 그때는 작은 외삼촌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작은 외삼촌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시간이 몇 년이 지나서 어제야 비로소 어머니께 연락이 온 것이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섰다. 입관이 오전 11시라고 했기에, 10시 이전에 도착하기 위해 8시쯤 출발했다. 9시 반쯤 장례식장에 도착해보니 어제저녁 올라온 큰 외삼촌이 미리 와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여쭤보니 장례는 없이 입관 후 바로 화장터로 이동해서 화장을 하겠다 하셨다. 어차피 결혼도 하지 않았고 연고도 없어서 올 손님도 기릴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례식장 대합실에 큰 외삼촌과 나란히 앉아서 가만히 시간이 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사촌 동생(큰 외삼촌의 막내아들)이 도착했다. 아무래도 관을 운구할 사람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서 함께 왔다. 약 30분쯤 뒤에 어머니와 동생이 도착했다. 장례식장에 오기 전에 작은 외삼촌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을 다녀왔다고 했다. 작은 외삼촌이 사망 당시에 가지고 있던 소지품에서 발견한 열쇠를 들고 동사무소에 방문해서 주소를 알아내 다녀왔다고 했다. 하지만 집안이 온통 물건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집 안에서 사진이나 유서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물건이 현관을 가득 메우고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작은 외삼촌의 입관을 기다렸다.

  어머니와 큰 외삼촌께 여쭤보니 작은 외삼촌이 협심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며 사망 당시 소지하던 소지품들을 보여주었다. 협심증 진료비와 치료 방법에 대해 빼곡하게 메모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병원 원무과와 경찰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같이 일하던 것으로 추측되는 누군가가 119에 연락했다고 했다. 일주일 전부터 가슴이 아프다 그러더니 갑자기 쓰려졌다고. 그렇게 병원에 실려와서 긴급수술을 진행하고 중환자실로 옮겼지만 그대로 사망하셨다고 했다. 119에 신고해준 지인은 누군지 알 수 없고, 누군지 확인하려면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서 직계가족임을 증명해야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더 이상 작은 외삼촌의 삶이 어땠는지 추측할 단서는 없었다. 그저 병원비가 없었으면 아쉬운 대로 큰 외삼촌이나 어머니께 연락이라도 한 번 해보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생각만이 들었다.

  11시가 되어 입관 절차를 진행하러 갔다. 20년 만에 본 작은 외삼촌은 내 기억 속의 얼굴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염이 끝난 상태라 코에는 솜이 박혀있었고, 얼굴은 협심증으로 인해 심하게 부어있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피부에 색이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마치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동생은 오열하시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서있었고, 나는 내가 아는 그 작은 외삼촌이 맞는지 삼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저 잠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삼촌"이라고 부르면 "제호야 잘지냈냐잉~"하면서 바로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당연히 살아서 만나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이렇게 죽은 상태로 만났다는 게 무서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오열하시는 어머니는 밖으로 모시고 큰 외삼촌과 함께 작은 외삼촌을 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 같이 장의차에 관을 실었다. 그렇게 관을 먼저 떠나보내고 어머니, 나, 동생은 함께 어머니 차에 올라서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로 가는 길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작은 외삼촌에 대한 추억도 나눴지만, 무엇보다 그동안의 삶을 추측하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어머니는 소지품이나 메모들을 볼 때 자전거 수리 일을 도우며 노숙을 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외갓집에서 제일 총기 넘치고 젊고 활력이 넘쳤던 외삼촌이 그 사이에 무슨 연고로 이렇게까지 바뀌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화장터에 도착해서 다 같이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화장 절차에 들어갔다. 장의차에서 관을 꺼내서 화장터 안으로 옮겼고, 화장터 직원이 관을 인수했다. 어머니는 설마 이게 마지막이냐고 물으시며 오열하기 시작하셨다. 다리에 힘이 반쯤 풀린 어머니를 부축해서 분향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관을 보시며 어머니와 큰 외삼촌은 작은 외삼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당신 집에 태어나지 마시고 더 좋은 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안타까움에 하신 말씀이셨겠지만 너무나도 서글픈 인사였다. 시신을 화장하는 데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우리는 분향소에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사촌 동생에게 작은 외삼촌 같은 죽음은 너무 쓸쓸한데 너도 그럴까 봐 걱정이다라며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뒤에 "제호 너도"라는 말을 덧붙이시며 약간의 본심을 표출하셨다. 평소처럼 나는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1시간 30여분이 지나 시신은 다 타버리고 유골만이 남았다. 유골을 기계로 분쇄해서 보자기에 잘 싼 다음 유골함에 담았다. 그렇게 20년 만에 만난 작은 외삼촌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가로, 세로, 높이 약 30cm의 통 안에 담겼다.

  다 같이 논의한 끝에 유골은 선산의 양지바른 곳, 좋은 나무를 찾아 수목장을 치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납골당에 10년 정도 모셔놓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어차피 찾는 이는 큰 외삼촌과 우리 어머니뿐이니 선산에 묻는 것이 그래도 더 자주 찾아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큰 외삼촌이 작은 외삼촌의 유골을 들고 선산으로 내려가서 내일 묻어주기로 했다. 큰 외삼촌을 광명역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너무 늦어질 것을 걱정한 큰 외삼촌은 우리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다시피 하시곤 열차를 타러 가셨다. 그리고 그대로 가족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너무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고독사가 내 가족, 내 친척에게도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우울해졌다. 아마 이대로 나도 결혼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낸다면 작은 외삼촌의 전철을 밟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너무 무서웠다. 조금 전에 내가 작은 외삼촌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오로지 나만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죽음이 가까이 있음에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소름 끼쳤다. 내가 죽어도 아마 세상을 그대로 잘 흘러갈 테니 말이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여러 가지 상념들이 겹쳤다. 마냥 무겁기만 한 게 아니라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감과 아쉬움, 슬픔, 두려움이 모두 섞여서 머릿속에서 뒤엉킨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한 다음에 동생에게 부탁해서 본가에 있는 내 앨범 속에서 내가 어릴 때 작은 외삼촌과 찍은 사진들을 찾아 휴대폰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그 사진들을 보고서야 '아, 삼촌은 이런 모습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속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사진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각각의 사진들을 찍었을 때가 조금씩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추억들을 삼촌과 이제는 절대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슬퍼졌다.


  사실 몇 년에 한 번쯤은 작은 외삼촌을 만나는 걸 상상해왔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어떤 것을 물어볼까 혼자 생각하고 준비도 해봤다. 그렇게 나는 혼자, 삼촌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면 제일 먼저 꼭 하고 싶은 말을 정해놨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삼촌 덕에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IT 컨설턴트 일을 하고 있어요. 삼촌 덕분에요."


  아마 기뻐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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