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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Nov 21. 2022

메신저의 중요성

  최근에 놀랄만한 기사가 하나 나왔다. 한때 유명 작곡가였으며, 현재는 방송인으로 방송을 하면서 요식업을 병행하고 있던 '돈스파이크'가 마약 투여 및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기사였다. 이런 일이야 연예계에서 워낙 흔하디 흔한 일인지라 나는 이번에도 그저 심드렁하게 쏟아지는 기사들을 소비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들도 살펴보았다. '실망이다.', '다 이미지 메이킹이었구나'부터 시작해서 '그럴 것 같았다.' 등 평소의 연예계 사건과 다름없는 반응들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 돈스파이크의 과거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캡처하여 올리고 그 캡처 밑에 '술은 안되고 마약은 되냐'라고 쓴 댓글이었다.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내용인즉슨, 우리나라는 술에 너무 관대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술은 마약에 비할 만큼 해로운 물질이며 음주운전이나 폭행을 유발하기도 하기에 주취 감경은 모든 범죄에서 사라져야 하고 가중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구 절절 옳은 말이긴 했다. 단지 쓴 사람이 이제는 마약 사범이 되어버린 돈스파이크라는 것이 문제일 뿐. 그러자 대댓글로 사람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그중에 내 눈에 띈 것은 '이래서 메신저가 중요하다.'라는 댓글이었다.


  정보나 내용이 정확하고 중요하다면 그것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중요한가? 아니면 메신저는 메시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가? 에 대한 해답은 사실 진즉에 나와있기는 하다. 아무리 좋은 말, 좋은 메시지라 하더라도 메신저가 악독한 범죄자라거나 말만 번드르르한 사람이라면 듣는 사람에게 좋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따라서 메신저를 고를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은 메시지에 따라 메신저를 고르는 게 아니라 메신저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한때, 작사/작곡을 배우던 무렵, 김이나 작사가의 책을 한 권 샀다. 과연 작사를 잘하는 작사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작사를 하는지 궁금했었다. 그 책의 여러 가지 내용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중에 메신저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김이나 작사가는 작사를 할 때, 그 곡을 부를 가수가 이미 정해졌으면 그 가수에 맞춰서 작사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20대 젊은 가수가 부를 노래에는 노년의 사랑이야기를 담지 않고, 40대 중년 가수가 부를 노래에는 캠퍼스의 낭만을 담지 않는 식이었다. 같은 노래더라도 메신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도 종종 메신저에 따라서 같은 노래더라도 마음에 와닿는 정도가 바뀐 적이 있다. 심지어는 같은 노래를 같은 가수가 다른 시기에 불렀을 뿐일 때도 말이다. 나는 10년 넘게 가수 장범준의 팬이었다. 모든 앨범을 사들고 콘서트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덕질을 하던 나에게 탈덕의 순간이 온 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갔던 3집 콘서트장에서였다. 탈덕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내가 장범준의 노래를 더 이상 순수하게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장범준이 부른 노래 중에 '그 모습 그대로'라는 노래가 있었다. 앨범을 사서 처음 들었을 때 좋은 노래라 생각했고 그날에도 여전히 좋은 노래였다. 장범준이 말하길 자기 아내가 자기가 볼 때 이미 너무 예쁜데 더 예뻐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쓴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노래 가사는 '처음 만났던 그대로 바뀌지 않아도 너무 예쁘니 더 예뻐질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 사실을 모르고 들었을 때와는 달리, 노래를 만들게 된 배경을 알고 나니 더 이상 노래가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 너는 돈도 많이 벌어서 미인이랑 결혼했으니 그 모습 그대로가 이뻐 보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 심보가 워낙 못되고 속이 배배 꼬여있어서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뿐인데, 그 순간부터 장범준의 모든 사랑 노래들이 나에게는 와닿지 않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그 무수한 사랑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순수해 보이고 해맑은 청년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노래들이 돈도 사랑도 다 가진 부르주아의 배부른 사랑타령으로 들렸다. 그렇게 내 안의 장범준의 위상은 예전보다는 확실히 시들해져 버렸다.


  또 다른 경우로는 가장 최근에 갔던 아이유 콘서트를 들 수 있겠다. 평소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었던 콘서트였던지라 기쁜 마음으로 가서 콘서트를 즐겼고, 당연히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유는 콘서트 중간에 'strawberry moon'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근데 노래 가사 중에는 '바람을 세로질러 날아오르는 기분 so cool 삶이 어떻게 더 완벽해 ooh'라는 부분이 있는데, '삶이 어떻게 더 완벽해'라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그래 30살에 이렇게 크게 성공을 하고 4만 4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콘서트를 하는 너의 삶은 더 완벽할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고 그와 반대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모습에 조금 울적해졌다. 


  앞선 두 사례가 모두 내 못된 심보에서 비롯된 생각인 건 잠깐 제쳐두고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장범준의 노래도, 아이유의 노래도 예전과 무엇 하나 바뀐 건 없었다. 라이브 실력은 더 늘어서 오히려 더 좋아지면 좋아졌지 안 좋아질 요소는 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 노래를 전달하는 메신저인 장범준과 아이유가 너무나도 거대한 거물이 되었다는 것뿐. 하지만 그렇게 메신저가 달라진 것 만으로 내 안에서 그들의 노래는 변색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메신저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끔은 메시지 그 자체 보다도 훨씬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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