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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Dec 27. 2022

냉소적인 사람

  최근에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성황리에 끝났다. 이례적으로 겨울에 하는 월드컵인 데다가 몇몇 새벽 경기를 제외하면 경기 시간이 시청하기에 꽤 괜찮은 시간대였기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들 시청을 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2002 월드컵을 제외하면 가장 경기를 많이 봤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러한 월드컵 분위기가 매우 낯설기만 했다.


  나는 본래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야구, 농구 등 거의 모든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관심이 없다. 단지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사로 접한다. 이번에 어느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더라, 이번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누가 취임했다더라 수준으로만 말이다. 심지어 남자아이 치고는 너무나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어린 나를 앉혀놓고 손수 하나하나 야구 룰을 알려주신 적도 있다. 분명 내가 어머니를 따라 같은 팀을 응원하게 되어, 아들과 같이 야구를 보는 날을 꿈꾸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어머니 덕분에 야구가 어떤 스포츠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잘 알게 되었을 뿐, 정작 야구 그 자체에는 조금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내심 아쉬우셨으리라 싶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으셨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에 차 있었다.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골을 넣는 장면이 나오면, 장례식장에서도 사람들이 웃으며 환호할 정도였다. 너무 주변에서 축구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관심이 없는 나조차 엔트리 11명의 이름은 다 알 정도였다. 조별 예선이나 16강전 때는 학교에 다들 모여서 관람하거나 학교 수련회 중에도 빔 프로젝터로 경기를 쏴서 보여줬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도 한국의 모든 경기를 다 보게는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환호성을 지르거나 즐거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대망의 8강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는 날이 다가왔다. 그날의 경기 시작 시간은 대략 오후 2시 정도였다. 때마침 토요일이었기에 학교는 오전 수업만 진행했고, 방과 후에 나는 그대로 어머니 가게(슈퍼마켓)로 향했다. 나를 본 어머니는 마침 잘됐다며 나에게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쥐어주시고는 어서 집에 가서 축구를 보라고 하셨다. 먹을 것을 그대로 받아 들고 온 나는 마침 집에서 할 것도 없었기에 안방에 가서 TV를 틀었다. 하지만 시작 휘슬이 채 울리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경기시간은 한참 지나서 끝나있었고, TV에서는 경기 하이라이트를 반복해서 틀어주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티브이를 보니 홍명보 선수가 공을 차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뛰어감과 동시에 '한국 4강 진출!'이라는 자막이 나왔다. 그제야 대략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렇게 잠에서 깬 나는, 남는 과자와 음료수를 들고 다시 어머니 가게로 향했다. 남는 과자와 음료수를 어머니께 반납하자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축구 봤어?? 장난 아니더라."

  "아니, 나 그냥 잤는데."

  "잤다고?? 어머, 너는 애가 그걸 어떻게 안 보고 자??"

  "졸리니까."

  "우리나라가 4강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인데 잠이 와?"

  "우리나라가 4강에 가면, 내가 뭐 좋아지는 게 있어?"

  그 순간을 기점으로 어머니는 내가 스포츠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을 포기하셨다.


  이처럼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몇십 년간 그런 성향은 전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말투에도 냉소적인 성향이 계속 묻어 나왔다. 단어의 선택이나 대화의 흐름뿐만 아니라 말을 던지듯이 툭툭 내뱉는 것도 냉소적인 성향을 부각해 주었다. 새로운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첫인상은 대부분 '시니컬하다'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좋게 말해서 감정에 기복이 없이 안정적인 사람이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물론 냉소적인 것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늘 최악을 대비하게 해 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요 없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내 할 일을 해낼 수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순 있었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에 맞춰 움직이다 보니 점점 더 그렇게 변해 갔다.


  무언가에 열광하거나 미치는 것은 나에게 점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콘서트장 같은 데 가서 정신을 놓고 뛰거나 좋아하는 야구팀을 목소리 높여 응원하는 등의 일은 나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가끔은 일부러 그렇게 해보려 시도하지만, 그럴 때마다 너무나도 정신이 또렷해지고 '이걸… 굳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곧 그만두었다. 정말 그런 행동이 필요할 때는 술이라도 마구 들이켜야 겨우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사는 게 재미없어졌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마니아나 오타쿠들이 내심 많이 부러워졌다. 무언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저렇게 정신없이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내 모습이 싫어질 때가 많아졌다. 가끔은 나 자신에 대한 그러한 감정들이 혐오로까지 발전하기도 했고, 그런 내면의 갈등들을 엉뚱하게 표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계속 갈피를 못 잡고 방황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금색의 갓슈'라는 만화를 보게 되었다. 이 만화 속 등장인물 중 하나인 포르고레는 스스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사자에 비유하며 과거 얘기를 시작한다. 과거의 포르고레는 누구에게나 까칠하고 매번 싸우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성미 때문에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부모와도 사이가 멀어져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 길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전파사에서 틀어놓은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하마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TV속 하마의 옆에는 많은 새들이 날아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포르고레는 사자로 있기보다 하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자신을 바꾸려 열심히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포르고레는 마침내 하마 같은 유쾌한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회상은 끝이 난다.


  나도 예전에 어떤 모임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호랑이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포르고레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하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잘 되지는 않지만 나름 하마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본다. 물론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잘 되다가도 냉소적인 모습 한 번에 도로아미타불이 되곤 하지만 말이다.  


  며칠 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 씨는 생전에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셨었다. 나도 이 분의 말씀대로 냉소적인 성향은 조금 내려놓고 인생을 좀 더 재밌게 즐기면서 희망을 갖고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바라건대 새가 날아와 내 옆에 앉아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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