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기는 우체국 1층 객장에서 안내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팀장으로 일하다가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면서 보직을 내려놓고, 책임을 지지 않은 업무를 하게 되었다. 삼 년째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눈길을 피해 숨느라 애썼지만, 이제는 상대가 달라졌다. 고객들은 굳이 안내를 원하지 않았고, 그는 투명 인간이 된 듯한 기분으로 하루 종일을 버티는 게 일이었다. 석 달만 더 버티자고 다잡아보지만, 막상 정년 퇴직일이 눈앞에 닥쳐오자 막연한 불안이 가슴을 짓 눌렀다. 여태껏 많은 고민 끝에 계획을 세우지만 정작 행동에 옮기는 실행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망설이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의심하다가 상대적 손실을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기도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늘 같은 말로 그를 맞았다.
"오늘은 어땠어?"
그러나 그 질문은 위로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손해 보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하는 따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상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거실 소파에 반쯤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단돈 삼만 원만 내면 온누리상품권 사만 원 상당으로 돌려받고, 강원도 리조트에서 숙박과 식사, 이동까지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이런 걸 공짜를 해줘.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자려고 누웠지만 눈앞에 광고가 어른거렸다. 진행하는 업체 이름도 낯설고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 같아 꺼림칙하지만 '정부 지원 사업'이라는 문구가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아내는 거듭 만류했다.
"절대 가지 마. 뉴스 안 봤어? 젊은 사람들 해외로 데려가 감금하고 장기 적출까지 했다잖아."
그러나 상기는 무기력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실랑이 끝에 아내는 당부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하는 것으로 뜻을 꺾었다.
"술은 절대 마시지 마. 깨고 나면 콩팥 하나 없어질 수도 있어."
상기는 다짐했지만, 사실은 겁이 났다. 생사를 가를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울한 상황을 바꿀 계기가 되기를 절실히 원했다.
12월의 첫 토요일. 아직 날이 완전히 밝기 전이고 기온마저 영하로 내려간 새벽 거리는 썰렁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사람의 기척이 무서우면서도 그리웠다. ‘내가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 동선을 확인해 줄 CCTV라도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카메라의 위치를 연신 살피며 걸었다.
사당역 1번 출구를 나서자,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공영주차장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버스에 올라타자 이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해맑게 웃으며 안내했다. 상기는 '쟤도 뭘 모르고 아르바이트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동승자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부부로 추측되는 중년들이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혼자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쓱 훑어본 바로는 남자 하나, 여자가 셋 정도가 혼자 온 듯했다. 혼자 앉았으므로. 모두 합쳐 대략 서른 명이었다. 다들 단서가 될 만한 특이한 점은 포착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진행자들이 물과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도시락에 수면제나 마약이 섞여 있지는 않을까?'
상기는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보고 나서 한 입 한 입 천천히 다 먹어 치웠다.
버스는 강원도 땅으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산봉우리들, 얼어붙은 계곡. 상기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길 끝에 뭐가 있을까. 정말 리조트가 있을까. 아니면 어딘가 모를 외딴곳으로 끌려가는 걸까.'
정선에 도착했다. 안내를 맡은 여자를 따라 이리저리 골목길을 다니며 아리랑과 아우라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타고 떠나가는 총각을 배웅하며 처녀가 불렀다는 노래. 이별의 노래. 기다림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여자가 노래를 부르자 몇몇 사람들이 따라 불렀지만, 상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래가 가슴에 와닿았다.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심정.
버스는 가리왕산 골짜기로 깊이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찬바람이 불어 솔잎 소리로 가득 찬 숲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도 상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러 채의 건물이 나타났다. 사람들을 삼삼오오 다른 건물로 들어가게 했다. 명상 체험이라고 했다. 상기는 나무로 지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명상실이라고 쓰여있었다. 방석이 깔려 있었고, 창문으로 숲이 보였다.
"편하게 앉으세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상기는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안내 여자가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이 잠겼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기는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놀란 듯 웅성거렸다.
"저기요! 문이 안 열려요!"
누군가 소리쳤다. 상기는 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작됐다. 드디어 시작됐어.'
몇 분 후, 안내 여자가 밖에서 문을 열자, 냉기가 훅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났어요. 깜짝 놀라셨죠?"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상기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다.
아침,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정동진 바다로 가서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버스 탈 때 흘깃 보았던 혼자 온 남자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를 의심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 일 없이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괜한 의심을 해서 고생한 것이라 생각하니 슬슬 긴장이 풀리고 있음을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두 시쯤이었다. 바다는 푸르렀다. 파도가 철썩철썩 밀려왔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상기는 바다를 보며 한없이 졸아들어 겁에 질린 자신이 옹졸하게 여겨졌고, 의심하며 지내온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적셨다. 갈매기가 울었다. 상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제 집에 가면 뭘 해야 하나.'
여전히 막막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틀 동안은 무료하고 우울한 일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상기는 맨 뒤로 가서 높은 의자에 앉았다. 모두 잠들었지만 홀로 깨어 있었다. 네이버 지도의 길 찾기를 켜놓고 버스의 경로를 체크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행로조차 모르면서 버스 가는 길을 따지고 있는 게 너무도 한심해져서 피로감은 극도로 심해져 갔다.
상기는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7시 반쯤 사당역에 도착해서 지하철 타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2.
"너무 늦네."
수경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가운데에 김치찜이 놓여 있다. 가지런히 줄을 맞춘 뼈 돼지갈비 사이로 흐물흐물한 김치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는 듯했다. 새로 지은 밥을 뜸 들이는 시간까지 정확히 맞춰 놨지만, 식탁의 온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수경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내렸다.
일곱 시 반쯤 사당역에 도착해서 곧장 귀가하겠다는 카톡을 보내왔던 남편은 여덟 시 반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 사당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이십 분 거리다.
카톡을 보냈다. '도착했어? 왜 안 와?'
잠시 후,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졌지만, 남편은 아무 답도 보내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벨이 여섯 번쯤 울리고 나서야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 여보?"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대답은 없었다. 수경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사이에 꺼져 있었다. '왜 꺼져 있지?' 심상치 않은 기분이 서서히 번져왔다.
112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여행 갔다가 온다는 시간에 귀가하지 않았어요. 혹시 사고 신고된 게 있을까요?"
"아직 접수된 사고는 없습니다. 요즘 연말이라 그런 일 많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경찰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 뭘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런 실마리가 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수경은 휴대폰을 뒤져 연락처를 훑어봤다. 남편의 친구들 번호는 없었다. 대신 '현태'라는 이름이 눈에 걸렸다.
현태는 일 년 전 골프연습장에서 알게 된 동생이다. 여행업체를 운영하는데 말수가 적지만 눈치가 빠르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야, 수경. 남편이 무슨 지원을 받아 무료 여행 갔는데, 온다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안 왔어."
"정부 지원으로 간 행사였죠?"
"응, 그런가 본데 자세히는 몰라. 정선에 있는 리조트 사진을 보냈었어."
"한번 알아보고 전화할게요."
잠시 후 도착한 그의 메시지에는 짧게 쓰여 있었다. '김상기 씨, 명단에 없다고 합니다.'
순간, 수경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직접 가보자’라고 제안했다.
서울을 벗어나 정선으로 향하는 길에는 눈이 흩날렸다. 차 안은 조용했다. 수경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도 침묵했다. 그저 운전에만 집중했다. 옆에 앉은 수경의 얼굴을 흘깃거릴 뿐. 수경의 얼굴은 창밖을 향한 채 굳어 있었다.
'명단에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수경은 생각했다. 남편이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정말 무슨 사고가 난 걸까.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고, 졸고 있었던 듯한 직원은 명단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김상기 씨는 없습니다. 대신 저희 명단에 있던 '남기현' 씨가 취소하셨거든요. 그런데 취소하기 전의 인원과는 맞았는데…."
수경은 믿을 수 없었다. 어젯밤, 남편이 그곳 객실 사진을 직접 찍어 보냈는데, 이름이 없다니.
"남편이 503호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어요. 확인 좀 해주세요."
직원은 수경의 휴대폰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그런데 저희 전산에는 김상기 씨 이름이 없어요."
담당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실마리도 없었다.
현태가 끼어들었다.
"CCTV는 확인할 수 있나요?"
"개인정보라서…. 경찰이 요청하면 가능한데요."
수경은 어지러웠다. 현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누나, 일단 나가요.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두 사람은 리조트 밖으로 나가서 24시간 영업하는, 옛집을 개조한 식당에 들어가 뜨끈한 온돌방에 앉았다.
"조금이라도 먹어요."
"배는 고픈데…. 잘 넘어갈지."
"힘내야 찾죠."
수경은 국밥을 반쯤 비우자, 긴장이 풀리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따뜻한 바닥에 스르륵 무너졌다.
현태는 등을 벽에 기대고 두 다리를 펴서 포개었다. 수경의 머리를 들어 포갠 다리 위에 놓았다. 한 손을 수경의 가슴에 얹었다. 수경은 잠시 후 눈을 떴다.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고, 그의 손이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벌떡 놀랐을 상황이었지만 수경은 오히려 이상하게 안온했다.
'이게 뭘까, 안도일까, 포기일까.'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고, 바닥의 온기가 그의 체온인 양 등줄기 아래로 은근하게 번지며 보호받는 감각과 낯선 끌림이 섞였다. 오래 묵었던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경은 문득 십여 년 전 일을 떠올렸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직접 보았다. 회사 후배였다. 젊고 예뻤다. 그때의 분노는 불같았지만, 지금은 아무 감정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었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분노는 무관심으로 바뀌었고, 기대는 체념으로 변해갔다. 남편은 사과했고, 수경은 용서했다. 아니, 용서한 척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남편이 중학교 동창인 수동에게 속아 1억 원을 날렸을 때도, 수경은 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체념했다. '역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이제는 단지 조용히 숨 쉬고 싶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도, 원망하는 일도, 희망을 품는 일도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현태는 리조트의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수경은 커피를 받아 들며 먼저 말했다.
"오늘은 정동진에 가보려고."
현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서울에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누나, 혼자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고마웠어."
"바다를 보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걸요."
그는 또 연락하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정동진의 바다는 차가웠다. 수경은 동쪽 바다는 푸르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짙푸를 줄은 여태 몰랐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몰려왔다가 제자리에 돌아갔다.
수경은 바닷가에 서서 생각했다.
'기다린다는 건, 결국 나를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침 바닷바람이 차가워 옷깃을 여미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너무 늦었어."
그러다 다시 크게 말했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파도가 쏴 소리 내며 하얗게 몰려와서 발끝을 적셨다. 수경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로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무음으로 돌려놓았는데 그동안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이 있었고, 문자메시지도 그만큼 쌓여 있었다.
병원으로 오라는 경찰의 문자다.
순간, 수경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3.
일은 어젯밤에 일어났다.
청소차가 새벽의 사당역 전집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밤새 내어놓은 쓰레기 봉지를 주워 던져 넣던 청소원은 아직 어둑하지만, 골목 안쪽 바닥에 놓인 물체가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채고 경찰에 신고했다. 남자는 웅크린 채로 모로 누웠고, 양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짠 듯 손아귀는 옷깃을 움켜쥐고 있었다.
경찰이 주머니를 뒤져 소지품을 거두고 지문인식을 해서 간단하게 신원을 확인했다. 김상기. 59세. 주소는 서울 강서구.
관광버스는 사당역 1번 출구 공영주차장에 일곱 시 반에 도착했다. 상기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건너편을 보고 멈춰 섰다.
마침, 먼저 도착한 삼화 산악회라고 사인이 켜진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중에, 분명히 박수동이 있었다.
'수동이다!'
상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찾아 헤맸던 친구. 1억 원을 가지고 사라진 그놈.
상기는 도로를 건너 10번 출구까지 뒤를 쫓았다.
"수동아!"
수동은 돌아보았다.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으며 다가왔다.
"야, 상기야!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상기는 그의 태연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오랜만?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 미안하다. 연락 못 해서. 베트남에서 일이 좀 꼬여서…."
"일이 꼬여? 1억 원을 가지고 잠적한 게 일이 꼬인 거야?"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동은 상기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한잔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다 설명할게."
상기는 수동을 따라갔다. 설명을 들어야 했다.
전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여행 내내 긴장해서 그런지 아까부터 배가 좀 아팠다. 상기는 급하게 화장실에 갔다.
그 사이 수동은 막걸리와 모둠전을 주문했다.
"미안, 배가 좀…."
"괜찮아. 나 담배부터 한 대 피우고."
수동이 일어섰다.
상기는 옆 의자에 놓인 배낭을 보면서 '도망가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 나갔다.
술집 옆 골목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잔뜩 널려 있었다. 수동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걸 보며 상기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내 돈은?"
"도망갈까 봐서 감시하러 나왔냐?"
수동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너, 돈은 꼭 갚는다. 걱정 마라."
"언제?"
"솔직히 말해서 그 돈, 나한테 빌려준 게 아니고, 우리가 동업한다는 개념으로 네가 투자한 거잖아. 사업이란 게 실패할 수도 있잖아. 엄밀히 말하면 내가 갚아야 할 이유가 없는 돈이거든."
상기는 어이가 없었다. 귀를 의심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그 돈 어딨어?"
"나도 베트남 도매상에게 선금 주고, 디자인하는 프리랜서한테 계약금 주고. 꼭 필요한 데 썼어."
"그래서 어찌 된 건데?"
"다 도망갔어, 씨발."
수동은 가래를 뱉었다. 그리고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언제 줄 건데?"
"한 삼 년만 기다려라. 꼭 준다."
“삼 년?”
상기는 귀를 의심했다. 삼 년을 기다리라고?
"장난하나?"
"장난 아니야. 진짜로. 지금은 없어. 삼 년 안에 꼭 갚을게."
상기는 수동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달아올라 온몸에 열이 퍼졌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수동의 멱살을 잡아 골목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새끼가 지금 나를 갖고 노냐?"
수동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러지 말라고 했다.
"야, 진정해. 내가 진짜로 갚을게. 이러지 말자."
그러자 상기는 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수동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정확히 왼쪽 턱을 갈겼고, 수동은 골목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으며, 입술이 찢겨 피가 흘렀다.
상기는 여전히 주먹을 쥔 채 서서 흥분하고 있었다. 평생 처음 사람을 때렸다는 사실이 자신을 놀라게 했다. 팔이 떨렸다.
그러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아니, 통증이라기보다는 압박감이었다. 흙을 담은 마대를 가슴에 올려놓은 듯한 무게감.
상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움켜쥐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을 쥐어뜯었다. 옆으로 쓰러졌다.
수동은 놀라서 일어났다. 입술의 피도 닦지 않고 상기를 잡아 흔들었다.
"야, 왜 그래? 야!"
"으... 으으..."
상기는 신음만을 낼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동은 당황했다. 골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야, 잠깐만 기다려. 119 부를게."
수동은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멈칫했다.
'119를 부르면…. 경찰이 올 거고. 내가 그런 거로 의심받을 거고. 폭행죄로. 아니면 사기죄로.'
수동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깐만. 잠깐만."
수동은 골목 입구로 갔다. 사람이 지나가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초겨울의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른 술집 안에서 배낭을 챙겨 나와 골목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4.
수경이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가는 내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 가슴이 내내 뛰었지만, 서늘한 영안실의 공기를 한 모금 들이켜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하얗게 질린 듯한 남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얼굴을 보려고 그 모진 세월을 견뎠던 걸까?'
경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외부 충격의 흔적은 없었고,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는 게 요지였다. 부검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상기의 삶도, 수경의 애정도 건조하게 찍은 마침표가 말라가고 있었다.
수경은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오가고, 친척들이 수군거렸지만, 수경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남편의 친구들도 몇 명 왔지만, 박수동은 오지 않았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수경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은 이상하게도 이전보다 더 넓어 보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물어야 했다.
그날 밤, 수경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꿈을 꾸었다. 바다가 나왔다. 정동진 바다.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가고, 밀려왔다 돌아갔다. 그 리듬 속에서 수경은 서 있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5
한 달이 지났다. 수경은 다시 정동진을 찾았다. 혼자였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들이 지나가고, 터널이 지나가고, 작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모든 것이 지나갔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다. 흘러가는 것과 머물러 있는 것의 경계가 희미했다.
정동진역에 내렸다. 바다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 천천히 걸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변함없이 리듬을 타며 밀려왔다 돌아갔다. 수경은 모래사장에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다림은 먼바다를 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수평선 너머 무언가가 떠오를 거라고 믿는 것.
하지만 이제 알았다. 기다림의 끝은 바다 너머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것을.
삼십 년 넘게 남편을 기다렸다. 변하기를, 성장하기를, 책임감을 갖기를, 사랑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변한 건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문득 정선에서 들었던 노래가 떠올랐다.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노래. 하지만 정선아리랑의 처녀는 정말 총각만을 기다렸을까? 어쩌면 그녀도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파도가 발끝을 스쳤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수경은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다시 밀려와 발등을 적셨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냉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그녀를 깨웠다.
'이제는 자신을 기다려야 할 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자기 행복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수경은 바다를 향해 한 발짝 더 들어갔다. 파도가 무릎까지 올라왔다. 차가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 차가움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현태였다.
"누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
목소리가 예전과 달랐다. 좀 더 단단했다.
"오늘 저녁 같이 식사 어때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고마워. 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알겠어요. 언제든 연락해요."
전화를 끊었다. 수경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은빛 물결이 끝없이 펼쳐졌다.
"기다림은 끝났어."
수경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이제는 걸어가야 해."
그녀는 바다에서 나왔다. 모래사장에 앉아 발을 닦았다. 물기를 닦고 신발을 신었다. 천천히 일어섰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그 파도는 기다림의 상징이 아니었다. 리듬이었다. 삶의 리듬. 계속되는 움직임. 멈추지 않는 흐름.
수경은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다를 등지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이 모래 위에 찍혔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을 지웠다. 하지만 수경은 계속 걸었다.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며.
멀리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바다 위를 선회하다가 육지 쪽으로 날아갔다. 수경은 그 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갈매기는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가 높이 떠올랐다. 겨울 햇살이지만 따뜻했다. 수경은 얼굴을 햇빛 쪽으로 돌렸다. 눈을 감았다. 햇살이 얼굴을 비췄다.
그 순간, 수경은 깨달았다. 기다림의 끝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자기 자신의 시작.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의 시작.
"늦지 않았어."
수경이 다시 중얼거렸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녀는 눈을 떴다. 앞에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걷는다는 것, 움직인다는 것,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수경은 걷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다도, 파도도, 기다림도 뒤에 두고. 앞으로, 자신을 향해.
겨울 바닷바람이 등을 밀었다. 차가웠지만 힘이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수경은 계속 걸었다.
새로운 시작이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펼쳐지고 있었다. 기다림의 끝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