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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Jun 11. 2024

무량사에서 '백세의 스승' 매월당을 만나다

부여 2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무량사를 찾아간다. 무량마을 입구에 이르자 방문객을 검문하듯 오래된 느티나무가 도로 한 가운데 버티고 섰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고목 뒤에 차를 대고 검문에 응한다.

느티나무 옆 길섶에 열두분의 장승이 서있다. 나쁜 기운과 악귀를 쫓는 벽사로의 역할을 하는 장승이다. 나름 유명한 무량마을 장승도 세월의 풍우에는 이기지 못하는가 보다. 깊은 연륜에 비례하여 장승의 윤곽은 희미해져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오른쪽으로 갈수록 장승의 표정은 또렷해진다.

넓은 주차장에 비해 사하촌에 형성된 상가는 번잡하지 않아 좋다. 묵과 산채나물로 이름난 식당과 버섯, 산나물, 약초 등을 파는 가게가 몇 곳있다. 엄나무, 옻나무가지를 망에 넣어 걸어놓은 풍경에 부질없이 카메라를 갖다 댄다.

'만수산무량사'라고 씌여진 만수산 일주문은 듬직한 원목을 그대로 세워 더욱 고색을 드러내고 있다. 검소하고 소박한 일주문이 답사객의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게 한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옛 절터로 알려진 현 사찰의 동쪽인 이 넓은 지역은 2003년 학술조사 과정에 여러 동의 건물기단 석열과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연호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그 역사를 가름해 볼 수 있다.

김시습 묘소

2020년 새로 마련한 김시습 묘소. 부도, 좌판과 시비가가 세워져있다.

옛 절터 옆의 돌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묘소가 있다.

무진암 입구에 위치한 1945년에 조성한 김시습 부도

1945년에 조성한 김시습 부도는 무진암 입구 승탑밭에 있다. 일제강점기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이 부도가 함께 넘어져 김시습 사리가 발견되었다.

무량사 경내에 새로이 조성한 김시습 부도

이 때 발견된 사리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다가 2020년 이곳에 새 부도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김시습 시비

시비에 새겨진 김시습의 시 한수를 옮겨본다.

새로돋은 반달이 나무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 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뜰에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 김시습 지음, 정한모 역
당간지주

기다란 돌기둥 두개가 단아한 모습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다. 통일신라시대의 제작 방식을 지켜서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별다른 장식이 없이 소박하다.

천왕문

당간지주를 살펴보고 있는데, 연화심은 천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천왕문을 통해 보이는 극락전이 액자 안에 든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빨리 오란다.

천왕문 사이로 보이는 극락전
사천왕

사천왕은 뒷전이다. 천왕문 사이로 보이는 극락전의 장중한 모습에 넔을 잃는다. 한쪽으로 비켜선 소나무가 구부려지며 이층 극락전의 지붕을 살짝 가린 풍경이 정말 그림같다.

극락전, 오층석탑, 석등, 천왕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정연한 느낌을 준다.

법당 앞의 오층석탑, 석턉 앞에는 석등이 천왕문까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정연한 느낌을 준다.


무량사는 보물만 6점을 보유한 사찰이다. 그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핵심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이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인조 때 다시 지었다 한다. 극락전도 이때 지어진 것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밖에서 보면 2층 목조 건물이지만, 내부는 1, 2층이 나누어지지 않고 트여있다.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호)  출처 : 문화재청

중층전각으로 이루어진 극락전에는 주존불로 소조아미타여래삼존불(보물 제1565호)이 봉안되어 있다. 조각승과 정확한 조성연대가 알려져 있는 소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아미타, 관음, 대세지보살이 결합한 삼존도상의 드문 예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오층석탑(보물 제185호)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앞의 석등(보물 제233호)은 아래 위 받침돌에 연꽃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의 곡선이 경쾌하게 표현되어 있다. 통일신라 이래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고려 초기의 석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전 왼쪽의 향나무 , 배롱나무, 다복솔 같은 정원수가 요사체와 작은 법당 건물을 가리고 있다.

유홍준은 "무량사는 공간 배치가 탁월해 아름다운 절집이다. 극락전 왼쪽으로 요사체와 작은 법당이 낫게 쌓아올린 축대에 올라 앉아 있고, 그 앞으로 향나무 , 배롱나무, 다복솔 같은 정원수가 건물이 통채로 드러나는 것을 막아준다."고 극찬한다.

양화궁

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말에서 따온 예쁜 이름의 선방을 지나서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을 건너면, 왼쪽에 산신각인 삼성각과 오른쪽 아래로 울타리가 처진 집이 있다.

삼성각

그 오른쪽 집이 김시습 별채라고 안내 팜프렛 에서 소개하는 청한당이다. 방문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울타리 넘어서 바라보니 현판의 글자가 무슨 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본다. 한가할 한(閒)자가 뒤집혀 쓰여 있다.

청한당

청한당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오면 '매월당 김시습 초상'(보물 제1265호)을 모신 영정각을 만난다. 김시습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자,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문인이다. 수양대군의 쿠테타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전국을 떠돌며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말년을 무량사에서 보냈다. '김시습 초상'은 조선시대 야복(벼슬에서 멀어진 야인이 입는 옷) 초상화 중 걸작이란 점에서 가치가 높다.  

절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절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광명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무량사는 꽃과 잎이 다 떨어져 을씨년스러운 겨울인데도 만수산에 둘러싸여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절집의 공간배치, 천년고찰의 명품 유물들이 방문객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무량사는 '배신과 반역'을 '정의와 상식'으로 포장하는 혼돈스러운 요즈음, 백세 스승 매월당의 위대한 삶을 사색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

산사를 떠나는 방문객들에게 번뇌의 암흑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가도록 말 없이 조언하는 광명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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