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한줄평 : 고통 받을 자유도 무한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
▷평점 : ★★
▷영화 :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5.2월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다'(괴테)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에게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가 보내는 편지에 담긴 괴테의 문구가 이 영화 전체를 대변한다. 뉴욕항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따라 어두운 이민선 밖으로 나와 환호와 함께 눈앞에 펼쳐 보이는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의 모습은 이민자로의 삶의 행로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문득 1968년 충격적이었던 혹성탈출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할지는 각자의 선택의 몫이다.
브루탈리즘(Brutalism)이란 프랑스어 ‘베통 브뤼트(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에서 유래한 말로 노출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기하학적인 구조를 특색으로 1950~70년대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을 말한다. 영화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이런 브루탈리즘을 추구하는 건축가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라즐로의 콘크리트 표면과 같이 거칠고 순탄치 않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암시한다.
헝가리에서는 바우하우스를 졸업하고 부다페스트 시립 센터를 건축할 정도로 인정받는 유능한 건축가였고, 아내 에르제벳 토스 (펄리시티 존스)도 영국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할 정도로 엘리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대인 이민자가 되었다. 노숙자 쉼터를 전전하고, 공사판 인부의 삶도 고달프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기회는 주어지는 법. 자신의 서재를 리모델링 했던 계기로 인연을 맺은 백만장자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그의 천재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기념 건축물 설계를 맡긴다.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억압과 폭력의 나라 미국의 민낯
그러나 한줄기 빛으로 보였던 해리슨은 자재를 운반하던 기차사고를 계기로 라즐로의 예술적 도전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어느 순간부터 라즐로를 존경하는 천재 건축가가 아닌 경멸과 조롱하는 가난한 이민자로 대하기 시작한다.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본가가 예술가적 소양을 갖춘 건축가에게 갖는 열등감을 극복해 내기란 쉽지 않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용하여 부를 창출해낸 초기 자본가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들이 신분 상승을 하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일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천민 자본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인간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 다름 아니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이상을 관철하고자 하는 라즐로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도모할 수 있는 센터 건축을 완성하고자 하는 라즐로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1980년, 제 1회 건축 베니스 비엔날레. 라즐로의 회고전에서 1976년에 서야 완공된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 홀로코스트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하부 구조물과 자유를 상징하는 두개의 기둥, 그리고 십자가 모양의 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전쟁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상징한다. 높은 천장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방들은 그가 갇혀 있던 수용소 방의 크기를 염두에 두었다. 라즐로는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상처의 역사를 이 건축물에 박제하여 남긴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해리슨은 천박한 자본을 이용하여 비열한 방식으로 라즐로를 통제하고 폭력을 가했지만, 그의 예술적 가치까지는 훼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비엔날레에서 조카 조피아가 남긴 마지막 멘트는 의미심장하다.
'삶이 아무리 유린당해도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조카 조피아(아리안 라베드)
영화 <브루탈리트>는 한 인간의 고통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홀로코스트 당사자로서, 유대인으로서, 이민자라는 신분으로서, 가난한 예술가로서, 아픈 아내를 돌봐야 하는 남편으로서 주인공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너무나도 크다. 그렇기에 그의 고통의 보편성을 찾고 공감을 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고통의 심연속에서 몸부림치는 연약하고 고뇌엔 찬 존재만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타당한 이유랄것도 없이 인간 그 삶 자체가 고통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케한다.
자유를 얻기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선택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프지만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브루탈리스트'로서 날 것 그대로 거칠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각자의 무거운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것 아닌가. 나만이 아는 흔적들을 남기며 그렇게 살아내는 것 그 뿐아니겠는가?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3시간 34분 긴 상영시간 중간에 휴식타임(인터미션 15분)도 고맙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했는데, 올해 3월초 아카데미상에서도 작품상을 비롯한 10개 부문 후보에 지명되었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 브루탈리즘(Brutalism) 주요 건출물
2025.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