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 처음으로 기억되던 그날

영화 <리틀 아멜리> 리뷰

by 제이바다

▷한줄평 :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처음’에게 보내는 헌사

▷평점 : ★★★★

▷영화 : 리틀 아멜리(Little Amelie or the Character of Rain), 2026.1.14개봉

※ 본 글은 씨네랩(http://cinelab.co.kr) 초청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발칙한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영화 〈리틀 아멜리〉는, 〈살인자의 건강법〉, 〈적의 화장법〉으로 잘 알려진 벨기에 출신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원작으로 한다.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나도 오래전부터 아기는 성인과 같은 수준의 인지 능력을 지닌 채 태어난다고 생각해 왔다. 그 안에는 ‘신’ 또는 ‘외계인’ 같은 존재가 하나씩 숨어 있다고… 아직 말하고 걷는 신체적 역량이 갖춰지지 않았을 뿐,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온갖 요구가 쏟아질 것을 알기에,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모두 웃고 말았다.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아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너를 알고 있어!”라고 말해보라. 탄로 날까 두려운 나머지 아기는 크게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동 총량의 법칙’이 작동하는 제로섬의 세계에 던져진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는 삶, 뺏고 뺏기는 노동의 고단함을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굳이 나서서 먼저 할 일은 없어 보인다. 신체적 역량이 갖춰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일이다.


아멜리 노통브가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울러 이 성장 판타지를 후기 인상파 화가가 한 컷 한 컷 직접 그린 듯한 천연색 수채화 애니메이션과 통통튀는 경쾌한 음악으로 구현해 내며, 영화를 보는 내내 눈과 귀를 호강하게 만든다.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스스로 신이라 믿는 아기 아멜리는 두 번째 생일이던 날 드디어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기로 결심한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의 작은 산마을에서 태어난 아멜리는, 자신만의 세계인 ‘튜브’ 안에서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작은 지진이 일어난 두 번째 생일날, “드디어 신에게 시선과 육체가 생겼어요.”라는 선언과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 〈리틀 아멜리〉는 그렇게 세상에 발을 디딘 아멜리가 세 살이 되기까지 성장해 가는 과정을, 일본 특유의 사계절 풍경 속에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도 ‘처음’의 순간은 있었다. 처음 누군가를 응시하고, 처음 두 발로 걷고, 처음 말과 단어를 내뱉고, 처음 타인과 감정을 주고받던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경이였을 것이다. 영화는 세상의 중심이었던 ‘신’ 같은 존재였던 어린 아기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리 잡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 분류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아멜리의 정서적 상징을 표현한다.



1. 봄 : 처음으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하던 날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신’이었던 아기는 가족과 자연을 만나면서 드디어 넓은 세계로 확장해 나간다


몸은 빠르게 성장해 가지만, 타인과 소통 오류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아기의 언어와 어른의 언어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기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어른들에게 그것은 분노의 비명으로만 들린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한때 사용했던 아기의 언어를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오빠 안드레와 언니 줄리엣의 장난감을 빼앗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렇게 집안의 작은 괴물처럼 여겨지던 어느 날, 벨기에에서 온 할머니가 화이트 초콜릿 한 조각을 건넨다.


“화이트 초콜릿의 즐거움은, 신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야말로 눈이 반짝 떠지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화이트 초콜릿’을 매개로 처음으로 타인과의 주고받는 상호작용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아기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을 터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단맛의 환희는 그렇게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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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벨기에 할머니가 준 화이트 초콜릿의 단맛은 평생 잊을 수 없다



2. 여름 : 처음으로 이름 속에 담긴 ‘나’의 의미를 알게 된 날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책을 읽기 시작하고, 문자가 의미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나의 정체성을 확장해 간다.


아멜리는 서서히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입에서 나온 단어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진공청소기’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그 기계가, 유모 니시오를 따라다니며 지켜본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온 가족들은 이 사건을 기뻐해 마지않는다.


“마치 내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름을 불러 줘야 하는 것 같았어.”


그렇게 아멜리는 어른들과 동일한 언어로 소통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세상 속에 존재하는 나와 타인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책을 읽고, 문자를 배우며 아멜리의 세계는 더욱 확장된다. 니시오는 요괴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어 주고,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비를 맞는다. 니시오는 아멜리(Amelie)의 일본 이름인 아메(Amé)가 비(雨)를 뜻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나는 그냥 빗속에 서 있고 싶어요.”

“그럼요, 네 이름이 바로 비(Amé)이니까.”

“내 이름은 나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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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김 서린 창에 쓰인 아메(Amé, 雨)라는 이름이 갖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름은 존재의 첫 정의다. 아멜리는 자신의 이름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멜리는 한 평생 비가 올 때마다 일본에서 불렸던 아메(雨)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것이다. 니시오는 아멜리에게 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선물한 것이다.


3. 가을 : 처음으로 감사와 선물을 건네던 날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가족과 함께 간 휴가지에서 유리병에 담아 갈 선물을 골똘히 생각하는 아멜리


가족과 함께 떠난 해변 여행. 벨기에 할머니에게 닥친 슬픔을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아멜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니시오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아쉽게 다가온다.


해변에 도착한 아멜리 가족이 저마다 휴가를 즐기는 사이, 아멜리는 두려움 없이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의 끝이 어딘지, 무엇이 자신을 삼킬 수 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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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벨기에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유리병에 담을 것을 찾기 위해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멜리가 집에서 챙겨온 유리병이 물가에 둥둥 떠있는 것을 발견한 안드레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다. 아멜리는 처음으로 오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빈 병에다가 바다의 향기와 추억을 담아 니시오에게 건넨다.


“이건 당신을 위한 거예요.

원하시면 열어 보셔도 돼요.”


빈 유리병에 가득 담긴 아멜리의 사랑을 느낀 니오시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것은 물질을 넘어선, 감사의 표현이었다.


%EC%95%84%EB%A9%9C%EB%A6%AC5.jpeg?type=w966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니오시는 아멜리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4. 겨울 : 처음으로 죽음과 이별을 마주하던 날

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할머니의 죽음과 니시오와의 이별은 큰 상실감을 불러온다.


얼마 전 슬픈 표정으로 황급히 벨기에로 떠나는 아빠의 모습 속에서 아멜리는 할머니의 죽음을 짐작한다. 누구도 그것을 직접 말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니시오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이를 어떻게 극복해 가고 있는지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제 삶을 인도하고 있어요.”


니시오는 아멜리를 망자를 기리는 일본의 전통 행사에 데려가고, 그 일로 유모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어 맞이한 세 살 생일날, 연못 속에서 할머니와 니시오의 환영을 본 아멜리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가까스로 구조된 뒤,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아멜리는 삶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치유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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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아멜리> 스틸 컷 – 죽음과 이별이라는 상처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 〈리틀 아멜리〉는 이렇게 세상 중심의 ‘신’이었던 아기가 타인과 관계 맺으며 하나의 인격체로 깨어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처음’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멜리가 경험했던 것처럼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나’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 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 때문이었다.


영화 <리틀 아멜리> 포스터


20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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