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은 죄가 없다 (42)

— S그룹 컨트롤타워 조직과 함께 일했던 기억

by Jace

세월이 참 빠르다.

요즘도 종종 ‘시스템 문제’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S그룹 계열의 토탈 IT 서비스 기업에 재직하던 시절,

나는 그룹 컨트롤타워 조직인 이른바 ‘ㅁㄹ 전략실’이

주도하는 계열사 경영진단 및 경영컨설팅 TFT에

차출되었다.

그중에서도 ‘운영 프로세스 및 시스템 진단’ 과제의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맡아,

비슷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세 차례나 수행했다.


프로젝트의 전개 방식은 늘 비슷했다.

소위 ‘별 보고 출근, 별 보고 퇴근’.

주말은 거의 없었고,

운이 좋아야 일주일에 하루 혹은 반나절 정도 쉴 수 있었다. 8주에서 10주 동안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강행군이

이어졌고,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끝에 그룹 수뇌부를 대상으로 한 최종 결과 보고서를 제출하며 프로젝트는 마무리되곤 했다.


보고서 작성은 또 하나의 고비였다.

S그룹에서 자체 개발한 ‘ㅎㅁㅈㅇ’ 오피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상세한 분석을 담은 ‘횡(橫) 보고서’와

C레벨을 위한 핵심 메시지 위주의 ‘종(縱) 보고서’를

각각 준비해야 했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실’에서 파견 나온 상무 또는

고참 부장급 책임자가 하루 8~10시간씩 집요하게 파고들며 강도 높게 챌린지하는 리뷰, 그들 표현으로는 ‘거증’ 과정이 이어졌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수치 하나, 도표 하나까지 예외는

없었다.

수정 사항을 반영하면 곧바로 재리뷰가 이어졌고,

그 강도 역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한자와 한글, 수치와 도표를 적절히 배합해야 했고,

대·중·소 제목 체계에 따라 불릿(글머리표)의 레벨을

로마 숫자, 아라비아 숫자, 영문 알파벳, 한글 가나다라

순으로 정확히 맞춰야 했다.


글로벌 컨설팅 펌 재직 시절 익숙했던 MS Office가 아닌,

S그룹 특유의 문서작성 도구와 C레벨 보고 규칙에 적응하는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작업이었다.

본질적인 내용보다 형식과 규칙에 익숙해지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고,

자정을 훌쩍 넘긴 심야 근무가 일상이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기본급의 몇 배에 달하는 초과근무수당 덕분에

가족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고서 작성 규칙과 형식에 익숙해지고, 최종 보고서가 통과되어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즈음,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결과물을 찬찬히 읽어볼 수 있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보고서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고,

핵심 메시지는 C레벨의 시선에서 극도로 압축되어

가독성 높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왜 그토록 집요한 리뷰가 반복되었는지,

그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S그룹을 이끌던 ‘ㅁㄹ 전략실’의 위상과,그곳에 속한 엘리트 집단의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존재가치가 분명히 느껴졌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반대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프로젝트에 세 번이나 투입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S그룹에서 근무한 4년 중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시간들이 바로 그때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시절 함께 일했던 차·부장급

핵심 멤버들 대부분은 임원이 되었고, 그중 일부는 대표이사 사장 반열에까지 올랐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 진하게 함께 일했다는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조용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당시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대외비)은 희미해졌지만,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결론이 하나 있다.

그룹 차원에서 ‘일등 기업의 DNA를 다른 계열사에 이식해 상향 평준화를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도입된 선진 계열사

시스템들 중 상당수가, 각 회사의 비즈니스 특성과

고유한 조직문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도 높은 리뷰 과정을 거치며 드러난 본질은 분명했다.

시스템의 기능이나 성능 문제로 분류되던 이슈의

80~90%는 실제로는 비즈니스 특성, 규칙과 정책,

세부 운영 프로세스, 그리고 인적 역량 및 조직 간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었다.


문득 오래전 흥행에 성공했던 한국 영화 〈넘버 3〉에서 검사 역을 맡았던 최민식 배우의 대사가 떠오른다.

(정확한 대사는 다를 수 있지만 핵심 메시지는 거의 똑같다)


“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지 모르겠다.

죄를 짓는 건 나쁜 사람이니 그 사람을 미워해야지,

그 나쁜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을 죄를

도대체 왜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그 대사를 떠올리며,

나는 당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왜 0과 1의 이진법 논리에 따라 움직일 뿐인 시스템을

탓하는 걸까. 시스템은 비즈니스 특성에 따른 정확한

요구사항, 정의된 규칙과 정책, 그리고 프로세스 플로우대로 작동할 뿐인데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프로젝트들은 단순한 경영진단이나 컨설팅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조직과 사람이 정의하지 않은 것들을 마술처럼 뚝딱

시스템이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아주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진실을,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몸에 새기게 만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