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도 객기도 아닌

일기

by 기묭



치기


카메라를 부쉈다. 물론 DSLR이었다면 부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장담하지 못하겠다. 카메라를 부수기로 마음먹었던 건 그 전 주에 이어폰을 찢었을 때다. 부숴버릴 거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주지 그랬냐는 친구의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그랬다면 언젠가 또 샀을 것이다. 하지만 부숴버리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언젠가 또 사려 할 때 억제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게 나의 대답이었다. 돈문제는 아니다. 씀씀이가 헤퍼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자는 의미가 아니다. 카메라를 부순 사건, 돌출되어 보이는 이 사건은 단순한 광기, 혹은 객기로 인해 벌어진 사건도 아니다. 이 사건은 과거에서 쏘아 올린 무수한 비상체가 그리던 궤도, 그 궤도의 교차로에서 벌어졌던 피할 수 없는 그런 사고였다. 라고 나는 말하고 있지만 본질은 단순한 광기나 객기일지도 모르겠다.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언던 적이 한두 번인가. 몇 번이고 부수려 했지만 끝내 휴대폰은 던질 수 없었다. 비쌌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대체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대체할 수 있었다. 자료수집과 취미라는 명목으로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지만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고 있던 터라 구입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카메라는 고시원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알바를 관두고 잠시 쉬던 기간에 사진을 찍으러 나가려 했으나 카메라가 방전이 돼 켜지지 않아 다시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다행히 부활하긴 했지만 휴대폰 카메라를 더 자주 사용했다. 화질 차이도 크지 않았다. 그럼 나는 왜 샀을까. 허세가 전부였다는 데에 일말의 변명거리도 없다. 대학교 1학년 사진실습 수업시간,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다음 주 바로 DSLR을 구입해 왔던 중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폴더폰으로 사진을 찍었다(그래도 B+를 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1년 뒤 군대 훈련소에서 작성했던 자기소개서의 좌우명란에 나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라고 적었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기는 참 너답다(서로 알게 된 지 2주도 안됐지만)라고 말했다. 그렇게 살던 놈이 언제 이렇게 허세만 가득하게 변했냐고 쓰고 있는 지금 오늘, 그제 주문했던 태블릿이 도착했다(블루투스 키보드까지). 그래도 처음 사려던 것에서 많이 내려놔 저렴한 쪽으로 구입했으니까.. 뭐. 무요.

그래도 많이 고민했다. 치열하게는 일주일, 가볍게는 거진 한 달을 고민했던 것 같다. 가격과 실용성 등 치밀하게 고민하게 된 건 중간에 카메라를 부쉈기 때문일 것이다. 여파가 남아있었기에 제주도에서의 반짝 워킹홀리데이(아빠 밑에서 건설일용직노무자(노가다))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허세를 부리지 않고 저렴하게 구입하게 된 것이 아닐까. 구입한 것 자체가 허세 일지 모르지만 허세로 남지 않도록 알차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전자기기도 해지냐는 물음을 들을 때까지 해지고 닳도록 알차게 쓸 것이다.






태블릿을 주문하고 취소하기만 4차례. 조수석에 앉아 고민하던 나에게 친구는 자기가 중학교 때 하던 짓을 하냐고 했다. 그런가, 사실 광기도 객기도 아닌 치기였던 것인가. 미용실에서 앞머리를 너무 짧게 잘라 한껏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겉모습만 아니라 속까지 어려졌던 것인가. 카메라를 부수기에 앞서 이어폰을 찢기에 앞서 머리를 자른 일이 있었다. 이제 아귀가 맞는다.






덧붙여. 하루 종일 꽂고 다니는 내 모습이 싫어서, 세상에, 주변에,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노라 찢어버렸던 이어폰은 서울에 오자마자 더 비싼 걸로 구입했다(웃음). 서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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