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상자’ 취재 후, 못다 한 이야기
- 보통 사람이 모인 특별한 제주에 주목하라”
- 공유어장 파도상자…‘커뮤니티 비즈니스’ 틀 수익 모델과 접목
- “유사한 철학, 경쟁자 아닌 파트너”, 생태계 중요성 제주서 실험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두었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J. 스미스, 셸라 암스트롱의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은 종종 이렇게 지구촌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지침으로 활용된다. 일단 듣고 나면 알 것 같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의 단계로 넘어가면 뭔가 자꾸 망설여진다. 가능하기는 할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연과 사람 모두가 잘살 수 있을 것이란 목표를 향해 항해에 나선 ‘파도상자’가 말한다. “일단 부딪혀서 보면 되지.” 아하 이런 너무 간단하잖아.
산업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주에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창업 인큐베이팅을 시작으로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를 위한 판을 만들었고, 투자 기능 강화를 위해 2018년 제주 지역 공공액셀러레이터로 등록해 직접 투자 사업에도 손을 댔다. 제주도 출연금을 활용한 ‘시드머니 투자사업’은 2021년 민간 액셀러레이터 크립톤과 ‘스타트업아일랜드제주 개인투자조합 1호’ 결성과 투자 영역 확장으로 이어졌다.
‘1호’의 의미는 각별하다. 씨를 뿌리고 물과 양분을 줘 자라게 하는 것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이 직접 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간격을 만들었다. 제주만 놓고 보면 한정된 자원과 좁은 시장, 섬이라는 불리한 환경이 있지만, 투자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보면 열린 시장과 잠재력, 가능성이 빛을 낸다. 물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신중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지만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 의지를 가진 기관과 기업, 도민을 설득하고 끌어들여 만들어낸 것에 출발의 의미인 ‘1호’란 명칭을 부여했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 카카오, 캐플릭스, 크립톤의 기부와 제주도민 25명의 출자로 모은 종잣돈(투자금)에는 ‘허투루’라는 단어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1호’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제주와 ‘동행’한다는 중압감과 추진력을 확보했다는 의미를 얻는다. 지난 과정을 알고, 또 귀한 낙점을 받은 ‘공유어장’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더 가슴이 뛰었다.
사전에 챙긴 것이라곤 업체 소개와 진행에 참고할 인터뷰 예시가 전부인 상태에서 약속보다 조금 일찍 W360에 도착했다. 혼자 어정어정 시간을 보내는데 근처에 마찬가지로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이 보였다. ‘혹시’가 ‘역시’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줄잡아 10여 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낯가림을 극복하고 입을 뗐다.
“유병만 대표님?”
“아, 예.”
‘공유어장’은 농어촌 개발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유병만 대표가 어부들의 불안정한 수익 구조를 해결하고 소비자에게 높은 품질의 수산물을 제공하는 유통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2019년 세운 스타트업이다.
2020년 9월 출시한 파도상자는 소비자가 어부에게 직접 수산물을 주문하는 선주문형 온라인 플랫폼으로 소비자가 전국 각지 어부들에게 온라인으로 직접 주문하면 어부가 14일 안에 조업을 진행하고 조업 직후 신선한 수산물만 발송해 주는 서비스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온라인 주문 시 신선도를 확인할 필요가 없고 원산지와 생산 일자도 믿을 수 있다. 어부들은 온라인 유통에 참여할 수 있으며 직거래로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공유어장은 현재 계절별 어종이 많은 제주 지역에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아가고 있다.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다. 사람은 늘 그렇다. 처음 만났지만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이 있다.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슬쩍 바다 얘기를 물었다.
“사업 아이템은 어떻게….”
요트로 세계 일주를 했던 경험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제 가격’에 식탁까지 그리고 어업인들에게 돌려주게 된 사연을 한참 들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
“제가 회를 먹지 않아서, 생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안 믿겨요”
“….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죠”
“소비자는 그럴 수 있지만, 어업인들의 동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 부분은 할 말이 많아요.”
17년째 해녀 취재를 하고 있는 터라 바다나 어촌계 사정에 누구보다 훤하다고 자부하던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귀기 힘들고, 한번 마음을 주면 누구보다 끈끈한 정(情)으로 이어지는 바닷가 사람들의 그것을 안다는 것으로 이내 아는 사이가 됐다. 70억 명이 사는 행성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깝게 연결돼 있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작은 세상 실험’과 비슷한 원리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지만 우연히 지인이나 경험이 겹치면 동질감과 더불어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한참 바다와 사람들 얘기를 했다.
예측이 힘든 바다를 삶터로 오로지 성실함과 노동력, 유통 시장이라는 ‘어딘지 억울한’ 시스템에 휘둘리면서 바다 사람들은 저절로 폐쇄적으로 된다는 것, 그만큼 ‘신뢰’에 대한 것에는 무엇보다 신중하고 단호하다.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한번 알고 나면 벗어나기 어렵다. 그 얘기를 한참 했다. 제주창조경제센터 보육기업 CF 촬영을 위해 한라산을 올랐던 박윤혁 주임이 도착하고 자리가 마련될 즈음에는 해가 다 졌다.
이어진 후끈후끈한 이야기는 〈J-Connect〉 봄호 Vol.21(brunch.co.kr/@jejucenter/367)에 일단 정리했다. 이제부터는 다하지 못한 것들을 모아 만드는 새 조각이다.
정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어떤 일이나 행동을 조종하는 사람이나 그러한 세력 말고 앞만 보며 달리느라 제대로 챙기지 않았던 ‘등 뒤’에 대한 얘기다.
경영과 관련해서는 현장 경험과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나서보니 온통 새롭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는 고백이 투정처럼 들리지 않는다. 바다를 아는 만큼 바다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고 크다. 그리고 그 바다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을 믿고, 믿어주는 만큼 믿고 싶어 하는 진심의 철학으로 만든다. 그것 역시 드러난 것이 아닌 밑바탕에 있는 측면, 배후다. ‘뒤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 공유어장 ‘파도상자’의 힘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에서 다시 ‘시작’을 외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힘이 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대담 중 ‘고령화 속도가 빠른 어촌계에서 파도상자의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파도상자 유병만 대표는 “대부분의 어부분들이 이런 형태의 직거래가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다”라며 “그래서 그냥 한번 써보라고 말씀드린다. 인사 영상만 한번 찍으면 상품 기획부터 조사, 리스팅, 고객 응대에 주문까지 일괄적으로 공유어장에서 처리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익숙해진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제주’가 보태지면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 ‘괸당’이라는 오래 알아 왔고,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특유의 문화가 틈을 내주지 않는 것을 힘들어했다.
“공유어장을 통하면 수익이 더 생길 것은 알지만 혹시나 기존 거래하던 상인분들과 문제가 생길까 우려해 선뜻 함께하려 하지 않아요. 전체 물량 중에 한 10% 정도만이라도 시도해 보면 공생할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아쉽죠.”
그렇다고 그만둘 생각은 없다. 이미 제주로 주소를 옮겼고, ‘사람’을 만났다. 유병만 대표가 목표하는 ‘플랫폼’은 기존의 그것과 조금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수수료라는 흔한 장치를 버리고 협업이란 동력을 쓴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규모를 키워 추가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거나 기존 모델을 고도화해 흑자 운영을 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불필요한 잡음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치상 가능한 것을 보는 것보다 공유어장의 마진을 적게 잡는 대신 시스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수익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마켓 플레이스’가 종착점이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다. 공유어장이 꿈꾸는 ‘온라인 어촌계’는 신선한 수산물을 원하는 때에 공급하고 제값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런 시스템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공동 조업을 하는 데는 도시에 사는 어촌 계원도 참여하고, 사정과 형편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어업의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어업 파이낸싱 플랫폼’이 그저 꾸는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제주’라는 선택은 탁월했던 것 같다.
“간단히 미팅하러 왔다가 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거나 솔루션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기도 하고, 쉽게 해결되는 경우를 제주에서는 종종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에요. 신이 납니다”
〈J-Connect〉 봄호에 다 싣지 못했지만, 제주 스타트업 생태계에 관한 생각과 도전에 대한 조언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미 제주를 소재로 뭔가를 해보려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 거예요. 현실적인 부분에 막히거나, 못하는 분들도 많고요. 어려운 지점이 보여서 포기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이런 분들도 스타트업을 할 수 있을까요.
유병만 일단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스타트업을 꾸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웃음). 애초에 혼자 답을 찾을 수 없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해답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동료가 필요하고 조력자가 있어야 해요. 나랑 같은 가치를 꿈꾸는 사람들이 합류해야 하는 거잖아요. 멀리서 보일 수 있게 내 가치가 보이도록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파도상자를 시작하기 전에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했어요. 10개가 넘는 아이템을 시도하면서 이래서 실패하고 저래서 실패하는 그런 과정이 있었거든요. 실패 경험을 통해서 내가 세운 가치가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단단해질 수 있었어요. 실패가 두려워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스타트업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스타트업 자체가 자기의 삶이에요. 내가 믿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표현하려고 스타트업을 해요. 또 트렌드를 읽어서 사업적인 기회를 포착하고 사냥하는 분들도 있어요. 둘 다 틀린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전자 쪽이에요. 철학, 방향성에 대한 것을 먼저 정리했고 정립된 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마련해 가고 있으니까요.
저의 장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패해도 최소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봤으니까요. 스타트업 중에 시드 투자를 받는 비율이 5% 그리고 후속 투자를 받는 비율은 30%, 그 이후에 살아남는 확률은 높지 않겠죠. 물론 저희는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가정이 있으니, 당연히 무섭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왔잖아요. 서울에 있다가 부산으로, 그리고 제주까지 왔다는 지금, 이 가치를 좇는 과정에 있다는 자체로 행복해요. 본인이 가치를 좇는 사람이고 그런 취향이라면 저는 스타트업에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박윤혁 오히려 그런 점이 또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특별한 가치를 갖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뿐더러, 자본을 투자한들 수익이 생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함부로 영역 침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유병만 한 투자사로부터 유사 업체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우려를 들었어요. 저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요. 오히려 감사하죠. 그 업체랑 저랑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거잖아요. 혼자서는 개척하기도 힘든데 ‘파트너’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아쉽지만 비슷한 모델을 만들어서 하겠다는 곳이 아직 한 곳도 없어요. 진짜 D2C를 시도하는 분이 없더라고요. 생산자 입장에서 B2B를 하는 분들은 꽤 있긴 해도요. 이건 제가 생각하는 가치관과는 다르죠.
정말로 누군가가 저와 같은 플랫폼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시장에 들어와서 함께 손잡고 또 새로운 걸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현재 8명이 정말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고미 파도상자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많은 시사점이 생기고 결론도 얻은 것 같습니다.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좋은 답이 되었던 것 같아요. 혼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스타트업이 가치관이 맞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해답을 찾아가고, 힘을 합치기도 하고요. 역할 분담을 하기도 하고요.
스탠퍼드대학교 사회학과 마크 그래노베터 교수는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이라는 논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운이 평소 잘 아는 강한 관계에서가 아닌 약한 관계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흔히 도움이 필요할 때 친한 친구, 가족, 친척 등을 먼저 떠올리지만 의외로 이러한 관계보다는 오히려 평소 자주 연락하지 않은 약한 관계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여러 사회 현상을 통해 증명됐다. 아이디어나 도움이 절실할 때 약한 관계의 힘은 우리의 예상보다 강함을 유병만 대표 역시 확인하는 중이다.
유병만 대표는 처음 ‘작은 어촌 마을’ 하나를 목표로 삼았다. 아는 사람은 없지만 필요한 것을 채우고 지지하는 것으로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것을 막고 살 힘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공유어장의 틀은 커뮤니티 비즈니스(지역 주민들이 주민 자치로 지역의 자원을 이용하여, 지역의 당면 문제를 지속 가능한 형태로 해결하려는 사업)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공유’라는 단어를 그냥 선택한 것은 아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인정한 소셜 네트워크 분야의 석학이자 사회학자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데이먼 센톨라 교수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혁신이나 메가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소셜 네트워크 변두리의 끈끈한 강한 유대”라고. 그러니 “세상을 바꾸는 메가 트렌드를 원한다면 보통 사람이 모인 특별한 장소에 주목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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