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그룹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
로컬은 세계를 움직이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처럼, 로컬에서 시작한 문화가 전 세계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시대가 도래했다. 재주상회는 이러한 로컬의 매력을 한껏 담아낸 독특한 콘텐츠를 서비스하고 있는 콘텐츠 큐레이션 기업이다. 스타트업 대표이자 로컬크리에이터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재주상회의 고선영 대표를 만나 로컬과 스타트업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마을 여행자를 위한 ‘콘텐츠 경험 공간인 사계생활’과 ‘리얼 제주 인(iiin) 매거진’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각각 어떤 서비스인지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려요.
사계생활은 예전 마을의 커뮤니티 소통 기능을 담당했다가 지금은 사라진 안덕농협 건물을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한 로컬 콘텐츠 라운지입니다. 제주에서나고 자란 식재료로 만든 로컬 식품과 가공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뛰어난 작가들이 제주를 주제로 만든 공예품, 굿즈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마을 커뮤니티 공간으로의 활용은 물론이고 로컬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전시회나 작업 공간으로도 사용하고 있죠. 제주 매거진 인(iiin)은 제주 지역의 문화와 소식을 담은 로컬 잡지입니다. 제주 사람들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지역의 가치를 담아내는 소식지인데요.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일상의 대화, 오래된 문헌에 담긴 제주의 모습, 제주의 길거리에서 마주한 특별한 풍경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제주의 시간 속에서 찾아낸 가장 제주다운 가치를 찾아내고 전달하는 것이 재주상회의 일이죠.
여행 작가로 일하시다가 인(iiin)을 창간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여행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도시를 방문했어요. 처음에는 여행하며 글을 쓰는 일이 행복했지만, 오랜 시간 일로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많이 지치더라고요. 2011년에 모든 일을 관두고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쉬기 위해 제주도에 왔지만, 여행잡지 기자로 수년간 일한 탓에 어디를 방문해도 여행 관련 아이템이나 문화가 먼저 보이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독특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 숙소에는 그 지역 로컬 매거진이 있다는 거죠. 매년 1,000만 명이 찾아오는 제주도에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만들었죠.
재주상회와 인(iiin), 사계생활. 모두 인상적인 이름인데요. 각각 어떤 뜻을 품고 있나요?
재주상회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콘텐츠는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오니까요. 재주 많은 사람이 모여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이죠. 인(iiin)은 ‘I′m in island now’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제주 방언을 활용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인’은 제주 말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제주가 이 안에 있다’는 의미죠. 사계생활은 사계리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일상을 담은 공간입니다. 사계리뿐만 아니라 제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한 곳에 담아 소개하겠다는 야심 찬 생각에서 브랜딩한 이름이죠.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콘텐츠를 확장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컬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키는 제품, 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매거진의 주제나 브랜딩할 특산품, 굿즈 제작 등을 선정할 때, 대표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기준점이 있을까요?
저희는 ‘독자나 소비자가 이걸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 어느 때라도 의미가 있는 오리지널한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이 목표예요.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로컬만의 특별한 콘텐츠, 문화를 소개하는 거죠. 아무도 몰랐던 콘텐츠를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보여주자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저희는 항상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에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봐요. ‘지금 해야 하는 일인가’,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인가’, ‘우리만 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Yes’라는 답이 나오면 과감히 진행합니다. 그게 곧 경쟁력이 되니까요. 다만 남들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들을 소비자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죠.
로컬이 주목받으면서 로컬의 정의에 대한 논의와 변화가 함께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컬크리에이터는 로컬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전에는 ‘로컬(Local)’이 ‘특정 지역, 현지의’라는 뜻만 지닌 말이었죠. 하지만 현재 시장에서 통용되는 ‘로컬 비즈니스’나 ‘로컬브랜드’ 같은 개념은 우리나라만 사용하고 있어요. 해외에서는 로컬이라고 하면 기부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죠. 우리는 로컬크리에이터가 가져야 할 소명 의식도 여기에 수렴한다고 봅니다. 나의 이윤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역이나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있어야만 좋은 로컬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어요.
로컬의 확장성에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로컬의 의미 자체가 확장 또는 변화하고 있다는 의견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컬을 폐쇄적인 것,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요. 전혀 아닙니다. 일례로 이미 제주는 전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는 또 하나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주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로컬을 만날 수 있죠. 실제로 지금 사계생활 1층에서는 부산의 로컬브랜드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제품이나 브랜드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 로컬 미디어들과 연계해서 브랜드의 역사와 로컬에서의 가치, 스토리를 함께 알리죠. 한번은 제주공항 리무진 버스 측면 광고를 보고 놀란 적도 있어요. 도내 버스이니 제주도의 관광지를 홍보할 줄 알았는데, 울산의 관광지를 광고하더라고요. 제주를 방문한 여행객 대상의 광고였죠. 이렇게 제주는 이미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장소라는 특징을 바탕으로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창구로 기능합니다. 다른 로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컬만의 강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면 다양한 발전 방법이 있습니다.
최근에 중기부에서 소상공인과 로컬기반 스타트업 생태계를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업가형 소상공인 매칭 융자 사업인 LIPS 역시 그 일환인데요. 이러한 변화가 로컬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정부의 지원 정책은 자금이 한정적인 로컬 기반 스타트업에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융자 형태의 지원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또 자금의 사용 가능한 범위가 넓혔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너무 포괄적인 지원은 자칫 로컬크리에이터들에게 안주를 위한 도피처가 될 수 있어요. 지원은 어디까지나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제한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로컬크리에이터들이 지원에만 기대지 말고 좀 더 주도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나아가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진출도 가능해요. 재주상회는 지난 4월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2023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도 참여했습니다. 가장 제주다운 요소 중 하나가 돌이잖아요. ‘제주 사람은 돌에서 나고 돌틈으로 돌아간다’라는 말도 있고요. 돌담은 우리 제주 라이프 스타일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예요. 그걸 집 안으로 들여보고자 돌담스툴을 만들었어요. 지원 하나 받지 않고 재주상회만의 힘으로 참여했는데, 로컬에서 전국사업으로 확장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로 나가도 충분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우리 동네에 있는 로컬 식당이나 상품도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온갖 브랜드의 음식이나 상품만큼 경쟁력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후배 로컬크리에이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로컬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로컬을 잘 보고, 잘 들어야 해요. 누구보다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하죠. 간혹, 우리 지역에는 로컬의 매력을 품은 서비스나 브랜드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단정 짓는 이들이 있는데요. 그건 아직 로컬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로컬이 가진 특징과 장점을 제대로 찾는다면 어떤 지역에서도 로컬 비즈니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컬의 정보를 아카이빙하고 이를 잘 소개하는 로컬 미디어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로컬 아이템을 찾고 있는 로컬크리에이터라면 로컬의 숨은 매력을 끄집어낼 수 있는 로컬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 로컬을 사랑하고 로컬을 제대로 이해하는 로컬크리에이터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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