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산책을, <산양 곶자왈>
꽤나 비싼 똑딱이 카메라, 리코 GR3를 구매하고 생긴 변화는 명료하다. 사진을 찍게 되었다. 쭉 뻗어있는 제주의 도로를 조금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 하나 스쳐지나 보내지 않았다. 내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휴일에 침대와 떨어질 수 없던 나에게, 일단 카메라를 챙겨 나가게 하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했다. '너무 많은 경험을 한 제주살이의 기록을 남겨야겠다.' 마음은 굳게 다짐하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막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떨 때는 내가 제주에 왜 와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휴일의 작은 산책은 제주에 온 이유를 다시 상기시켰다. 내가 사랑한 제주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작은 용기의 시작은 역시 소비에서 시작되나 보다.
물론, 아이폰을 사용하며 평소에도 핸드폰 카메라로 많은 사진을 남기곤 한다. '요새 핸드폰 화소가 1억이고, 아이폰의 색감은 여전히 훌륭하고..' 다 맞는 말씀이다, 거기에 대고 "디지털카메라에는 센서라는 게 있는데요, 이 센서 크기가 풀 프레임이고, 화소가 훌륭하더라도 그 픽셀값이 도출해내는 퀄리티가 높고 낮고.."라고 해봐야 피차 피곤하긴 마찬가지니, 이 카메라를 구매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는 감성. 온도와 습도, 그 공간 혹은 피사체에서 느낀 감정. 그 감정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행하는 보정과정. 이렇게 완성된 사진을 통해 발견하는 내 새로운 취향. 이는 곧 취미의 발전, 취향의 발견을 통해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산책을 가야 할까를 고민하니, 원론적인 제주살이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렸다. 왜 하필 제주도에 오게 되었을까? 역시나 제주의 자연이었다. 울창한 숲과 파랑 넘치는 바다는, 빌딩 숲과 인파 대신에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멀다. 그 거리감을 초록과 파랑이 채워주고 있었다.
내가 동경하는 서울의 삶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가까운 사람과의 거리였으리라. 출근길과 퇴근길, 퇴근 후 돌아온 내 동네, 홍대 앞 번화가에는 술집과 클럽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작은 가게 안에는 테이블 간격마저 좁았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붙어'있었다. 레고처럼. 하나의 완성된 레고 로봇처럼. 시끄러운 소리들은 익숙해져 새벽에 켜 놓은 티비 소리처럼, 그저 백색 소음이 되어 귓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감이 피로해 제주를 찾은 것은 단지 바다 건너 있는 외딴섬 이기 때문이었다. 차로 500km를 운전해 서울에 도달할 수 있는 내륙 지방과는 다르게 내 의지가 있어도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곳, 나를 모르는 곳, 사람과 사람의 간격이 넓은 곳, 제주의 자연은 피로하지 않았다.
이 넓은 거리감이야 말로 제주 속에서 한적한 숲길과 바다를 방문하는 이유이다. 오롯이 혼자 울창한 숲 속에 버려지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가끔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움찔대곤 한다.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속 버려진 사당 앞 옛 우물 안에 들어간 멘시키 씨처럼 말이다.
산책은 '걷는다'는 행위이다. 나는 산책을 통해 제주에서의 일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기록은 관찰의 영역이며 그의 결괏값이다. 생각을 멈추고 숲 길을 걷던 도중, 눈앞에 어두운 그늘에 덮여있는 고사리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나뭇잎 틈 사이로 한 줌의 햇빛이 비친다. 그 군락 전체를 비추는 것이 아니다. 한 줌 이상의 빛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이 숲의 높은 나무들은, 한 줄기 고사리에게만 그 빛을 허락했다. 순간 주변은 적막해지고 나는 이내 곧 객석에 착석한 느낌을 받았다.
착석하니, 씬이 바뀌며 커텐이 내려온다. 무대의 조명이 전부 다 소등된다. 어두운 배경 뒤로 긴장감이 고조되는 음악이 나온다. 단상 위로 한 실루엣이 보인다. 이내 조명이 켜지고, 무대의 조명은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한 줄기의 고사리가 이 거대한 군락과 숲의 주인이 되어 빛나는 모습에 적잖은 감동과 울림을 받으며, 카메라를 들어 내 감성을 기록했다. 사진을 보면 그 공간의 온도와 습도가 느껴진다. 무대를 본 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역시, 제주행의 목적은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없는 끝없는 감정의 깊이, 이 섬 곳곳에 스며든 이야기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이 똑딱이 카메라로 인해 이 글을 쓰고, 사진을 촬영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취미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주연을 맡은 고사리의 독백 씬을 만나볼 수 있기를, 해질녘 빛나는 바다의 윤슬을 담아 편지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초록과 파랑이 물결치는 곳으로 산책을 떠나고자 한다.
(어디로 가볼까요? 추천해 주시는 제주를 방문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