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 83. 우리 AI는 물지 않아요.

AI kills everything.

by JejuGrapher

퇴직 후에 여유 시간이 많지만 오히려 회사 다닐 때보다 AI 관련 뉴스나 연구 트렌드를 찾아보지 않는다. 큼직한 뉴스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알고리즘의 저주로 놓치지 않지만 디테일한 것들은 챙기지 못하고 있다. 역으로 어쩔 수 없이 투자 관련 뉴스는 좀 더 많이 보는 편이다. 일부러 찾지는 않지만 같은 알고리즘이 나를 투자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며칠 전에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아래 캡처 이미지처럼 Figma의 주가가 상장 이후로 줄곧 내리막길을 타서 공모가의 1/5에도 못 미친다는 포스팅이었다. Adobe에 피인수되는 것에 실패한 후에 성공적으로 IPO를 거치는 것까지만 보고 ‘될놈될’이구나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 주식이 단 한 번의 흐름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반년만에 반의 반 토막도 되지 않는다는 게 적잖게 충격이다. 발견한 종목에 겨우 1~20만 원의 소액만 넣어두고 관찰하는데 피그마에 그 작은 돈이라도 넣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다라고 느꼈다.

Figma의 IPO 이후의 주가 흐름


그런데 더 충격적인 점은 Figma만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Adobe, Salesforce, DocuSign, Duolingo 등의 기업의 최근 6개월 또는 1년 주가 차트를 보면 피그마의 차트와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모두 Saas (Software-as-a-Service)에 속한다는 점이다. SaaS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클라우드에 올려놓으면 사용자는 구독해서 서비스로 이용하는 비즈니스다. 특정 서비스 한 두 개가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지만, 특정 산업군 전체가 비슷한 몰락 — 다시 부활할 수도 있으나 — 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는 드물다. 말 그대로 붕괴다. 주가의 방향은 언제든 바뀌겠지만 유동성이 넘쳐나는 지금 산업군 전체가 같은 방향인 것은 별로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다. (늦었지만 SaaS에 들어간 소액이라도 가능성이 없어보이면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SaaS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자 (Moat)를 잘 쌓아 사용자를 가두리 해서 매달/매년 꼬박꼬박 구독료를 받으며 안정적인 비즈니스를 유지했다는 거다. 이 모델의 핵심은 ‘re-bundling’이다. 잘 알듯이 번들링 Bundling이란 어떤 잘 팔리는 제품에 다른 제품을 묶어서 판매하는 — 또는 그 제품의 가치를 더 높여줄 액세서리를 함께 얹어주는 — 전략이다. 대표적으로 SLR (요즘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입할 때 제공(?)하는 번들렌즈가 있다. 다른 렌즈가 없는 초보자에게 번들을 제공해서 큰 고민 없이 카메라를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PC 시절의 SW도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예를 들어, 문서 작성이면 충분한 사용자에게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묶어서 판매한 MS 오피스가 있다. 그런데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묶음 제품은 가볍지 못해서 스마트폰에 적합하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전략이 Unbundling인데, 즉 크고 무거운 제품에서 특정 기능만 떼어내서 앱으로 제공하는 전략이다. 모바일 초기에 성공한 많은 스타트업들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그러다가 네트워크 성능 향상과 함께 클라우드의 등장으로 다시 분리된 기능과 제품을 하나로 묶어서 제공하는 Re-bundling 전략으로 선회한 거다. 개별 제품/기능을 사용하려면 매월 1만 원씩 내야 하는데, 10개를 묶어서 구독하면 3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광고하니 나머지 9개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냥 10개를 구독하는 거였다. 특히 특정 산업군에 꼭 필요한 제품이라면 사업자가 그냥 구독 모델로 변경했을 때 저항할 수도 없었다. 대표적인 기업이 Adobe다. 디자이너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PhotoShop이나 유튜버들의 기본 프로그램인 Premiere Pro 같은 제품이다. 이들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도 없는 Illustrator 등을 모두 묶은 Creative Cloud를 구독해야만 했다. SaaS 기업은 그냥 해자가 깊고 성벽이 높은 문지기 (Gatekeeper) 전략으로 돈을 버는 기업이다. 울며 겨자 먹기의 시대에서 체리피킹의 시대로 바뀌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이런 비즈니스 전략에 AI 때문에 균열이 생겼다. 특정 업무를 위해서 불필요한 다른 기능까지 구독해야 했는데, AI가 그냥 그 기능을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전문 SW 기업들이 AI 기능을 그들의 제품에 접목하면 더 큰 부가가치를 얻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전문 기능이 별게 아니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AI는 사용자가 필요한 특정 기능만 떼어내서 그냥 제공한다. 말 그대로 ‘딸깍’이다. 사진 편집을 위해서 포토샵이 필요 없고, 동영상을 만들기 위해서 프리미어 프로가 필요한 건 아니다. 음악을 만들려고 비싼 장비와 SW가 필요한 게 아니다. 창의력과 실행력만 있으면 그냥 된다. 며칠 전 기안84에 올라온 영상은 현재 AI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음악가도 아니지만 곡을 만들었고 카메라 촬영 없이 뮤직비디오를 상상만으로 바로 생성했다. 작사와 노래는 기안84가 직접 만들고 불렀지만 이미 많은 부분은 AI의 도움을 받으며 만들고 있다. 최근 Spotify에 많이 스트리밍 되는 음악들이 AI로 만들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실제 많은 곡들이 AI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 주에는 SaaS 뿐만 아니라, SW 산업 전체가 AI 때문에 망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며칠 째 SW 기업들의 주가가 빠지고 있다. 아래의 표를 보면 그 심각성을 바로 알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photo?fbid=26829890646599433&set=a.377532812261910


AI가 모든 개인의 직업을 파괴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특정 산업군 전체를 파괴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 AI는 물지 않아요. 그냥 죽여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고나 82. 데우스 2.0과 노동의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