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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Feb 22. 2017

길은 길이 알려준다 _ 제주올레 1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2

  

제주의 봄은 올레의 계절이다.

 

육지보다 기온은 늘 웃돌지만 바람 많은 제주의 겨울은 춥고 황량하다. 울창한 원시림은 한순간에 헐벗고 하늘엔 늘 화강암처럼 짙고 흐린 구름이 깔려있는 날들이 많다. 한라산 중산간 도로나 깊은 곶자왈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노루도 겨울엔 보기 어렵다. 고도 높은 숲 속에 가득 펼쳐진 싱싱한 조릿대마저 겨울엔 바짝 움츠려 들고 새파랗게 질려있다.  

 

제주의 봄은 노란 유채꽃과 함께 온다. 겨울 동백이 꽃망울 채 툭툭 떨어진 자리에 따사로운 봄바람이 입김 한번 불어넣으면 섬은 금세 노랗고 하얀 꽃들로 물들여진다. 검은 돌담엔 윤기가 흐르고 귀여운 담쟁이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철없는 강아지는 팔딱팔딱 튀어 오르며 마을을 지나는 외지인을 반긴다.



그렇게 제주의 봄은 유난히 따사롭고 눈부시다.

  



그런 봄날에 어느 낯선 마을 낯선 길을 하염없이 걷는 건 분명히 보통의 여행과는 다르다.

그건 단순한 걷기와도 다르다. 지루하고 귀찮은 이동의 걸음이 아닌 유희의 걸음이라 할까. 몸은 가볍고 다리는 마치 새롭고 신나는 놀이에 참여하는 패처럼 움직이며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데 그 한 걸음마다 어찌나 생경하였는지. 난생처음 겪는 여행이었다.


나는 2015년 3월부터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제주 올레길 450킬로를 혼자 걸었다. 제주의 속살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제주 올레길은 모두 스물여섯 개의 코스로 나뉘는데 한 코스 당 평균 거리는 15킬로다. 어떤 사람에겐 15킬로가 대수롭지 않겠지만 그 길을 걷기 전까지 나는 변변찮은 산도 제대로 올라 보긴커녕 가까운 거리도 차를 끌고 다니는 걷기엔 젬병인 도시 여자였다. 게다가 혼자 여행이라니,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건 내 인생에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듬해 2016년 봄에 또다시 올레 전체 코스를 돌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걷기만큼 그림 그리기 또한 나는 순전한 생초짜다.


멀쩡한 직업을 버리고 부모, 형제 육지에 남겨두고 남편과 둘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로 훌쩍 이주해 와 걷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어 산다는 건,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의 삶일지라도 그 개인에겐 분명히 혁명이란 말을 붙일만하지 않을까.


어쨌든 그 혁명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내가 제주 올레길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스포츠 용품 회사의 TV 광고를 통해서였다.


'올레길도 문제없다.'

  


경쾌한 음악과 통통 튀는 멘트 아래 두 남녀가 손을 잡고 나풀나풀 길을 걷는다. 울퉁불퉁한 돌과 물웅덩이가 고인 길도 거침없이 밟고 나아가는 튼튼한 데다 방수 기능까지 장착한 운동화. 광고주에겐 안 된 말이지만 내 눈엔 그 운동화가 아닌 운동화가 걷고 뛰는 장소만 한 가득 들어왔다. (물론 나중에 그 회사 운동화는 샀다)


우리나라에 저런 곳이 있나 싶은 그곳은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초원과 구불구불한 작은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올레길은 어딜까, 그 길을 ‘문제없이’ 걸을 수 있다는 운동화를 광고할 정도면 꽤나 유명한 길일 텐데 나는 왜 몰랐을까.

그 후로 올레길은 내 무의식 어딘가에 깊이 정착되었는지 그로부터 몇 년 후 제주 도민이 되자마자 나는 일단 올레길부터 걸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평생 그 주위를 돌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멀고 먼 남쪽 끝 섬나라에서 살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상황이 혼재했겠지만 나에게는 제주가 내 오랜 바람인 여행의 로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시작지요 정착지가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에 육지를 떠나는 것에 큰 미련이 없었다.

 

하여튼 나는 올레길부터 걸어야 했다. 그래야만 바람 부는 이 섬과 제대로 조우해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같이 걸을 사람이 없다. 부끄러울 것 까지는 없지만 올레길을 걷기 전까지 나는 이렇다 할 홀로 여행의 전력이 없다. 혼자 여행을 하다니. 길치에 방향치, 저질 체력이기까지 한 내가 혼자 여행을 하다 길을 잃거나 발이라도 삐끗해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런 건 어떻게 잘 헤쳐 나간다 해도 혼자 다니면 따분하고 게다가 이 험한 세상에 무서운 일이 나타나지 않을 리도 없고.  


나 혼자 길을 걷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면 할수록 온갖 걸림돌이 여기저기서 달려들며 옴짝달싹 못 하게 하니 방구석에 누워 올레길 여행 책자만 들여다보며 떠날까, 말까, 떠날까, 말까를 수도 없이 반복하기만 한 날이 이어졌다. 나는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게다가 대책 없이 무모한 사람일 뿐이다.

  

제주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2015년 3월 어느 봄날, 그날도 올레길 관련 책자를 보면서 방구석 여행을 한창 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싱그러운 봄날이다. 따뜻한 햇살이 거실 창으로 한가득 들어와 마음을 간질간질... 나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벌떡 일어섰다.


  일단 떠나봐.

청바지에 운동화, 얇은 점퍼에 백팩을 메고 올레길 가이드북 한 권 달랑 챙겨 들고 제주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에 올라 J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올레길 가려고.

  

“뭐라고? 혼자? 안 돼. 위험해. 나중에 나랑 같이 가.”

  

나중에 언제. 암튼 지금 버스 안이야. 걷다가 무서우면 되돌아가면 되지. 일단 가볼게.  

  

이제 막 제주에 도착해 먹고 살 터전 만드느라 바쁜 J를 기다리기엔 나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치 저 먼 세렝게티라도 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각오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거창하고 요란하게 홀로 여행을 시작하는데 한 시간도 안 돼서 버스는 나를 어느 시골 마을 정류장에 내려놓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쌩하니 가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조용한 마을이 있을까. 소리란 소리는 죄다 누가 삼켜버렸는지 바람조차 불지 않는 그곳은 멈춰진 화면 속 같아서 나도 꼼짝 않고 서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대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광고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길이니 시작점에 도착하기만 하면 ‘여기부터 올레길입니다’라는 어떤 분명한 표시가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아주 지극히 평범한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그 유명한 올레길이 시작할 줄은 내 상상 속에서도 없었기에 나는 약간 실망했다.

  

올레 가이드북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올레 1코스 시작은 시흥초등학교다.

그럼 그렇지. 그 학교에 가서 정보를 얻자.

  

나는 버스 정류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을 조금씩 이동하면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학교를 찾았다. 시흥초등학교는 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백 여 미터 거리에 있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교문 앞에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잔디가 곱게 깔린 운동장에 잘 가꾼 정원수가 있는 그림 같은 학교였다.

하지만 그뿐, 학교 역시 너무나 조용했다. 오늘이 마침 이 마을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사라지는 그날 이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시작 지점에 와봤다는 건 일단 중요한 거야. 집에 돌아가서 올레길에 대해 더 알아보고 다시 오자.  


그렇게 초긍정적인 자세로 정류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얼핏 눈에 들어온 파란색 화살표, 올레 표시의 하나인 바로 그 화살표였다. 그것은 제주의 파란 하늘을 닮은 티 한 점 없는 선명한 파랑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저 쪽으로 가시오’라고 분명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홀린 듯 화살표들을 따라갔다. 정류장을 지나고 드디어 여기가 올레길이라는 분명한 표시가 한가득 모여 있는 곳이 나왔다. 책에서 보았던 올레 표지석과 파랑과 주황색 리본, 그리고 간세(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라는 뜻인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온 제주올레의 상징 조랑말 표시)까지 한 곳에 모여 올레길의 시작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걸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초록의 새순이 들판 가득 피어난 길을 혼자 걸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평일 오후에 조용하고 한가로운 시골길을 걷는다. 그것도 혼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기필코 나아가야 하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걷기.  


올레 표시를 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서 모험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넓은 올레길의 보물지도에 나오는 중요한 표시, 오십여 미터마다 나오는 그것들을 놓치면 나는 길을 잃는다. 어느새 나는 모험가가 되어 올레 리본과 화살표를 볼 때마다 몹시도 기뻐하며 보물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놀이에 흠뻑 빠져 들었다.

  

길은 둥실한 알오름으로 이어지고 정상에 오르니 와르르 눈에 들어온 하늘과 바다, 그 큰 그림 속에 성산과 우도가 마주하고 제주 동쪽의 풍경이 봄의 햇살 아래 고요히 펼쳐져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 오른 오름에 단박에 반해버렸다.   


그대로 마냥 걸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오종종 모인 지붕 낮은 집들과 검은 돌담이 나란한 종달리 마을을 지나니 물이 쑥 빠져 드넓은 해안이 드러난 길고 긴 종달리 해안도로엔 줄에 매달린 준치가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며 코를 간질인다. 올레 1코스 중간 지점인 휴게소에 들러 준치를 한 마리 구워 달라 해서 먹었다. 말캉하면서 쫄깃한 맛에 다섯 마리를 더 구워 달라 했다. 집에 돌아가면 J와 마주 앉아 준치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오늘의 긴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성산이 가까워진다. 제주 동쪽 어디서나 우뚝 보이는 성산을 걸어가면서 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성산과는 다르게 보인다. 차를 타고 주차장에 내려서 보는 성산은 그저 좀 크고 특이하게 생긴 오름일 뿐이었는데 멀리서부터 차츰차츰 다가가면서 보는 성산은 그 존재가 사뭇 다르다. 어떤 기운까지 감돌면서 영험의 흔적마저 엿보인다.






  

성산에는 늘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데 평소와 다르게 그 모습 또한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하루 종일 조용한 길을 혼자 걷다 갑자기 인파 속으로 들어가니 내가 꼭 다른 세상에서 걸어 들어간 사람 같다. 그들에겐 내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한 장소에 있고 그들도 같은 여행자인데 나에겐 그들이 여행의 풍경-조금 호들갑스러운 풍경-처럼 보여 그저 담담히 그곳을 지나친다.


어느덧 저녁 무렵이다. 1코스 마지막 지점인 광치기 해변 모래밭엔 새 발자국이 바다를 향해 뚜렷하게 나있다. 왠지 그 이름 모를 새가 오늘 내내 나와 함께 한 것은 아닐까 하여 새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파도만 밀려왔다 밀려갈 뿐 아무도 없는 그곳에 내 발자국을 더 한다.


 





저녁의 바다와 여행의 끝. 이쯤 되면 어쩐지 쓸쓸한 여운으로 약간의 허무마저 감돌 텐데 웬일인지 전혀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걷기... 걷기 여행이란 이런 거구나.

걷기 여행에서 걷기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 맹목적 수단이 아닌 어떤 일의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다. 아무리 좋은 여행이라도 여행의 끝에는 매번 허무와 상실감이 남았는데 걷기 여행에선 그런 게 없다. 걷기 여행은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걷기 자체가 여행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옆을 천천히 흐르는 세상은 걷기 여행에서 얻는 큰 선물이다. 바람과 냄새와 소리, 그 어느 하나도 심상치 않은데 걸을 때마다 바뀌는 풍경은 어떤 감동적인 영화 한 편, 책 한 권을 넘어서는 생생한 감각과 기억을 덧붙여 무수한 의미로 존재케 한다.  


15킬로의 길을 걸으면서 물 한 병 챙길 줄도 모르는 여행 초짜의 무작정 떠나는 홀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은 일단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준비다.


길은 길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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