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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유딧 Mar 23. 2017

길에서 자란다 _ 제주올레 5코스

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6

  J는 야생 서바이벌 정신을 동경하면서도 모험과 스릴을 멀리 하는 안전 주의자다. 주말이면 장보기와 집안일, 식물 기르기를 소소한 낙으로 삼는 J는 싸움의 기술을 신봉하고 마초를 추종하는 혈기왕성한 남자다. J는 날마다 철봉에 매달리고 역기를 들며 근육을 키우지만 걷기엔 젬병이다. 하체보다 상체가 크고 약간은 평발이어서 잘 걸을 수 없는 신체 구조란다. 

  "내가 못 걷는 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많이 걷는 거야. 대체 왜 그렇게 걸어?"

  J가 물었다.

  글쎄... 그걸 알면 그만 걸으려나.

  지난 네 개의 올레길 코스를 걸으면서 걷기에 푹 빠진 나는 날이면 날마다 J에게 올레길 타령을 했다. J에게 이 좋은 여행을 알게 해주고 싶은데 신체 구조 운운하며 시큰둥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같이 걸어주겠다고 한다. J는 사실 여행도 즐기지 않는다. 여름휴가 때 화끈하게 노는 연중행사가 J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여행이다. J는 여행보다 나들이를 즐긴다. 주말이면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거나 잠깐 걷기, 소위 바람 쐬고 오는 정도를 여행의 이상으로 삼는다. 그런 게 여행이라면.

  J에게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균 15킬로 거리를 걷는 여행은 도저히 이해 불가한 여행이다. J가 올레길을 걷기로 한 건 순전히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지 걷기가 좋아서 나선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의 요구와 설득, 반 협박에 못 이기기도 했다. 어쨌든 J와 함께 걷는다니 나는 마냥 들떠서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신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올레길을 꼭 순서대로 걸을 필요는 없는데 나는 무엇을 하든 앞에서부터 차례로 해야만 하는 성격이다. 건너뛰거나 옆 길로 들어서면 정신을 못 차린다. 공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건너뛰거나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면 꼭 길을 잃는다. 융통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 스타일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올레길도 정방향으로 1코스부터 착실히 걷고 있다. 1코스 다음엔 2코스, 2코스 다음에 3코스 식이다.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코스를 선택하지 않는다. 않는 게 아니라 못 한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멀든 가깝든 어떤 사정이 있든 하여간 무조건 차례로 죽. 

  J와 함께 걷는 올레길은 거리도 짧고 볼거리도 많은 코스로 정하기 위해 혼자서 연속 몇 개의 코스를 걸었다. 사실 어제 걸었던 4코스는 다른 날로 미뤄야 했다. 며칠 연이어 걸은 탓으로 몸이 힘들었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미리 알았다. 그런데도 J와 좋은(?) 코스를 걷기 위해 무리를 했다. 며칠 쉬면서 컨디션도 회복하고 날도 좋은 날 그 지루하고 길다는 4코스를 걸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굳이 꾸역꾸역 길에 나선 이유는 내 융통성 없는 성격과 J에게 올레길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4코스 역시 참 좋았다. 하긴 나에게 좋지 않은 올레길이 있을까.

  5코스부터는 아름답고 따사로운 제주 남쪽을 제대로 만끽하며 걷는 길이다. 유명 관광지가 많은 인기 있는 올레길이라 한적함보다는 들썩이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올레길 특유의 색깔이 없는 건 아니다. 올레길의 모든 코스에는 걷기 여행만의 특별함이 있다. 자연, 휴식, 여유, 한가로움, 사색, 감성. 올레길이 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올레길 걷기 첫 동행자 J와 함께 걷는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다. 혼자 걸을 때와 달리 무서울 일도 없으니 긴장 풀고 그야말로 마음껏 즐기면서 걷자. J도 오랜만의 여행에 들뜬 기색이다.


  5코스는 남원 포구에서 시작한다. 걷는 동안 내내 비가 오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이 덥다. 화사한 봄기운이 제대로다. 이대로 제주 한 바퀴를 돌고 싶다. 삼십 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벌써 5코스 볼거리 중 하나인 남원 큰엉에 도착했다. '엉'은 바닷가나 절벽에 뚫린 바위 그늘이라는 제주어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 커다랗게 뚫린 굴 속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바닷가의 굴이라는 것만도 신비로운데 큰엉 일대는 아열대 북방 한계선으로 육지에선 보기 어려운 다양한 식물이 서식한다. 1.5킬로 구간을 산책로로 조성했는데 아열대 식물이 아치형으로 두르고 있는 환상 터널이다. 산책로 옆 이백 미터 아래로는 기암절벽이 펼쳐져 있다. 제주 남쪽 바다는 깊고 푸르다. 파도도 세다. 쉴 새 없이 부딪치는 파도를 보며 걷는 남원 큰엉 산책로는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다.

  J와 나는 남원 큰엉에 온 게 이번이 두 번째다. 육지에 살고 있었던 지난해에 제주 여행을 하면서 이곳을 여행 코스에 넣었다. 그때도 분명 좋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다른 분위기다. 그때는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을 했다. 여기서 저기로 차로 이동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이다.

  오늘은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싱그러운 바람과 공기,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천천히 걸어서 만나는 풍경은 좀 더 생생히 다가온다. 시간과 걸음의 품을 들이는 여행은 '보다'를 넘어 '만나다'의 인연으로 맞닿는다. 시간에 정성이 들여져 공간에 다정이 깃든다. 기억도 남다르고 추억도 애틋하다.


  절벽 아래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바위섬에 파도가 부딪쳐 파편처럼 부서진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따금씩 파도가 분수처럼 솟구쳐 내가 앉은자리까지 물방울을 튀긴다. 나는 절벽 끝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남원 큰엉, 올레 5코스를 걸으며




  그림을 한 장 그린 후 산책로로 올라가 퍼걸러에서 잠시 쉬었다. 앞을 보니 바닷길을 따라 나무 말뚝이 박혔고 보송보송한 잔디가 깔려 있다. 길 끝에는 외국 풍의 건물이 세워졌다. 벼랑 끝에 세운 건물처럼 보인다. 그 풍경은 어쩐지 이국의 낯선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언젠가 세계를 걸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때도 걷다가 멈춰 그림을 그리겠다. 어쩌면 혼자서 여행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나는 좀 더 강해져야 한다. 여전히 나는 혼자 여행이 두렵다. 그런데도 여행에 대한 바람이 커서 떠나곤 한다. 나는 익숙하고 반복되는 삶을 원치 않는다. 그런 일상을 이 나이 먹도록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올레 5코스를 걸으며




  남원 큰엉을 떠나 빨간 우체통이 있는 정자를 지나 동백나무 군락지를 걸은 후 곤내골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J는 별로 배 고프지 않다면서 그 많은 밥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걷기 여행을 하다 보면 체력 소모가 많아서 쉽게 배 고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건 나만은 아닌가 보다. 먹다 보면 그제야 배가 고팠다는 걸 깨닫는다. 너무 좋으면 배고픔도 망각하는 건지.

  도시락을 먹은 후 다시 걸었다. 파도를 보며 바닷길을 걸어 조배머들 코지를 지나 위미리에 들어서니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카페 '서연의 집'이 나왔다. 카페 안에도 밖에도 사람들이 많다. 오늘 걸은 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본다. 걷기 여행보다 인기 좋은 건 유명 카페인가.

  아닌 게 아니라 그 영화는 꽤나 괜찮았다. 첫사랑 남녀가 성인이 되어 만나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알쏭달쏭한 감정에 휩싸이는 내용인데 영화 속에서 이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건축업자인 남자가 첫사랑 그녀를 위해 집을 짓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 집이 제주 위미리 바닷가에 있다. 영화는 성공했고 촬영이 끝난 후 여주인공 서연의 집은 카페로 바뀌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서연의 집 거실 통유리와 지붕을 걸을 때 보이던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그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바다를 쉽게 볼 수 없는 육지에서 살고 있었으니 집 안에서 바다가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서연의 집은 영화만큼 근사하지 않다. 바다는 영화보다 더 아름답다. 깊고 푸른 바다에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섬처럼 떠 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까. 일상이 여행 같을까.






위미리 바다, 올레 5코스를 걸으며



  



  J가 슬슬 치쳐간다.  J는 올레길이 이렇게 길 줄 몰랐다며 10킬로까지가 딱 좋았다 한다. 길은 이제 2킬로 남았다. J는 지친 다리로 터덜터덜 걷고 나는 아쉬움으로 천천히 걷는다. 나도 다리가 아프다. 그래도 오늘의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쉽다.

  효돈천 산책로에 들어서 마침내 5코스 종점인 쇠소깍에 도착했다. 올레 5코스는 지난 네 개의 코스보다 걷기도 좋고 볼거리도 많았다. 날은 따뜻했고 바람도 적당했다. 바다 물빛은 유난히 새파랗고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는 인상적이었다. 그런 길을 J와 함께 걸어 기쁘고 재밌었다. 이 여행에서 J와 나는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겼다. 소중한 추억이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 것 같다. 나의 여행이 아닌 것 같다 할까. 나는 오늘 여행보다 J에게 더 집중했다. 시간이 더 중요했고 공간은 배경으로만 존재했다. 5코스를 떠올리면 남원 큰엉과 쇠소깍 같은 멋진 장소는 기억하지만 그 길이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다. 15킬로나 걸었는데 길을 걷는 내 모습도 바람에 날리는 올레 리본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길을 오롯이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잠시 소풍을 다녀온 듯하다.  

   J가 올레길을 함께 걸어주길 그토록 바랐는데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 어느새 나는 혼자 여행의 맛을 알았나 보다. 낯선 자유와 두려움. 가야 할 길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과 결정. 나와 함께 길을 걷는 동행은 나, 그리고 나의 그림자. 그렇게 나는 길에서 배우고 길에서 자란다. 혼자 걷는 여행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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