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챗지피티와 같은 인공지능을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텍스트를 접하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어휘와 표현을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말이나 글을 더 풍부하게 꾸미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질문도 던져야 합니다. 어휘가 풍성해진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의미도 풍성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어학자 M.A.K. 할리데이는 "어휘의 다양성이 곧 의미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단어를 알고 쓰더라도 그것이 곧 깊이 있는 사고나 새로운 통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어휘의 겉모양 즉 문장의 화려함이나 복잡함에만 몰두하면서, 그 안에 담긴 의미의 본질에는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AI가 써주는 문장은 때로 매우 정교하고 유려하게 보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단어와 표현이 배치되어 있고 문장 구조도 흠잡을 데 없이 잘 짜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읽으면서도 "이 말이 진짜로 무슨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가?", "이 단어는 어떤 시각과 사고에서 나온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잘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그 문장의 형식적인 완성도에 감탄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의미가 구성되고 있는지를 묻는 훈련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문해력은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통해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며,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유’라는 단어 하나만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해방을 뜻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립이나 책임을 뜻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단어를 우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시선으로 구성하느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휘의 다양성에는 만족하고 있지만 의미의 다양성과 깊이에는 충분히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말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는 챗지피티와 같은 도구를 사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제공하는 텍스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관점, 전제, 그리고 빠져 있는 의미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식에 감탄하는 시대에서 다시 의미를 읽는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휘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싶은가에 대한 선택입니다. 말은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해력은 더 많은 단어를 아는 능력이 아니라, 그 단어들로 나만의 세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를 묻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