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큰 변환점은 어제 그리고 내일과 비슷한 평범한 오늘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게는 하교 후 집에 들어왔을 때 식탁에 앉아 목적 모를 서류를 뒤집으며 앞에 앉아보라고 말하던 엄마로부터 왔다. 오후 3시, 커튼 사이로 애매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앉은 바람에 그림자가 짙게 낀 엄마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고민한 흔적이 가득했다.
이내 나에게 건넨 엄마의 말은 그의 얼굴의 짙은 명암과 비교되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밝게 느껴졌다. 그 순간의 분위기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문장, 햇빛을 등지고 있던 엄마의 무채색 얼굴에서는 나올 수 없을 법한 제안이었다.
"너 미국에서 유학해볼래?"
갑작스러운 유학 제안에 머리가 핑 돌고 있던 그때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는 미국에서 공부하면 좋은 점을 나열하고 있었다. 설렘이 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에 바로 가고 싶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배운 영어는 교과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친구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제안이 얼마나 진지한지 궁금했기에 표정을 덤덤하게 유지한 채로 입장이 불명확한 변호를 시작했다.
혼자 미국에 가면 외로울 것 같다는 변호.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힘들 것 같다는 변호와 유창하게 영어를 쓰고 있을 미래의 나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음을 숨기는 변호. 입으로는 한국에 남고 싶다고, 머리로는 떠나볼까 생각하며 겉과 속이 맞지 않는 나의 입장을 밝힐수록 진지하게 유학을 권유하는 엄마와의 대화는 사건이나 사고는 없는, 각자의 엄숙한 얼굴 뒤로 앞으로 활기찰 것만 같은 내 미래를 향한 설렘을 숨긴 두 변호사들의 법적 공방 같았다.
결국 나는 가게 되었다. 내가 가기로 했던 것이 아니다. 가게 된 것이다.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나를 비웃듯 부모님은 모든 서류, 비자 인터뷰, 학교와 홈스테이까지 알아보시고 나를 미국으로 보냈다. 모든 게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지나치게 빠르게 느껴졌고 어느새 나는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커다란 엔진을 양쪽 날개에 달고 거침없이 날아가던 비행기는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 놓겠다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너무 빨랐던 탓일까. 중학교 3학년의 미국 생활은 엉성한 틈으로 가득했다. 한국에 남고 싶다며 엄마를 상대로 변호하던 나와 미국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나 사이의 틈.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형형색색의 피부를 자랑하던 사람들 사이의 틈. 비싼 돈을 들이고 가는 유학이니 만큼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돌아오리라 기대하며 나의 유학을 축복해주던 사람들과 정작 미국으로 가는 게 맞는 것인지 비행기에서 조차 고민하고 있던 나 사이의 틈.
앞으로 내가 적응해야 했던 것은 김치를 부르는 니글거리는 음식이나 영어를 못해 친구가 없던 내가 체육시간에 남몰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그 순간이 아니었다. 딱지가 되어 오랜 시간 떨어지지 않는 상처처럼 10년 동안 나를 살살 괴롭힌 것은 무수히 생긴 이 틈들이었다. 그것은 '이상적인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균열이자 나를 향해 쏟아진 축복 섞인 동경의 시선 그리고 정작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한국을 떠난 소년에게 일었던 불안감 사이의 틈이었다.
내 유학 생활은 이런 구멍 위에 쓰인 10년간의 일기다. 일기장에는 눈물로 번진 볼펜 글씨도 있고, 오늘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화려한 색으로 밑줄 친 문장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찍은 필름 사진과 졸업장, 시험 결과지 몇 장으로 이 빈틈을 채워나갔다. 용기 내어 나의 일기를 공개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쓰인 매일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빈틈을 안고 사는 건 다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천공항에서 쭈뼛대던 16살의 나를 포함해 나의 글을 읽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