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창석 Mar 08. 2024

돌아서니 옆이 시리고 허전하다.

늦둥이 아들이 입대하는날_두번째 이야기

늦둥이 아들이 입대하는 날(2)

우리는 타의에 의해서 뭔가를 해야 할 때 망설이게 된다. 썩 내키지 않음이다. 

어찌할 수 없음에도, 조금만 더 뒤로 밀려보고 싶고, 조금 더 나중에 하고 싶어진다.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거다. 




신교대는 휑하니 지나가는 도로변에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군부대라 썰렁한데 주변 분위기가 한몫을 더 한다. 크고 작은 4개의 건물이 보인다.

부대 앞 분위기를 잡고 있는 듯한 운동장 같은 망향비빔국수 본점과 그 앞에 있는 주차장, 그리고 좌우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2개의 카페가 전부다. 워낙 많은 사람이 일시에 몰리다 보니 카페는 만원이다. 허허벌판이라 다른 곳은 몸을 기댈 곳이 없다. 쉴 곳이 필요한 환경이다.    

    


무게감 있게 떡하니 서있는 신교대 정문을 보니 현실이 다가온 듯 아들의 얼굴빛은 어두워져만 간다. 


부대에서는 빨리 들어와서 수속하라고 방송을 연신 해댄다. 사람들은 속속 정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군부대라 들어가도 둘러보는 것도 제한받을 것이고, 딱히 볼 것도 없을 것 같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 가야 한다. 


"아빠, 드니가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데.." 첫째가 내게 살짝 귀뜸했다. 당연한 생각이다. 어쩔수 없지만 그래도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더 가져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국숫집 모퉁이를 돌아서니 커다란 건물에 카페가 있었다. 

여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아서 그런지 좀 한가해서 자리가 있었다. 40여 분 여유가 있어서 차 한잔씩을 주문했다. 그리고 커피잔을 들어서 건배하고 건강하게 다녀오도록 빌었다.  


원래 14시까지 들어오라는 얘기가 있었기에, 15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부대 정문을 들어서면 돌아서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정문에서 한 컷을 찍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무리에 끼어서 직진했다.


부대는 신병교육대만 있어서 그런지 그리 넓지 않고 조용했다. 43년만에 군부대에 들어와 본다. 

안내하는 장병들도 친절했다. 3번의 절차를 마치고 목걸이 출입증을 받았다. 입영장병은 별도로 입대영장, 나라사랑카드..등등의 서류를 가지고 별도로 등록하는 듯 했다. 이로서 아들은 입대한 것이 되었다.



조금은 오묘한 심정이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그랬고, 내 아들이... 의무라는 단어로 어찌할 수 없음에, 해야 하기에? 라고 포장을 하고, 합리화를 시킨다. 많은 단어가 머리를 스치나 어떤 단어로도 지금 이 순간은 설명이 안 된다. 직접 겪어보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지금 이 묘한 기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런 과정은 굉장히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말로 포장을 한다만..이해를 해주기를 바라지, 이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안내되어서 들어간 곳은 부대 내 교회였다. 

아마 민간인 출입이 가능한 곳 중 가장 넓고 깨끗한 곳인듯했다. 넓은 교회 안은 만원이다. 빽빽이 들어섰다.

부모님들과 여자 친구와 가족들이다. 


"오늘 여기 온 부모님 중에는 우리가 최고로 나이 많이 든 거 아닌가? " 아내에게 쓰디쓴 농담을 해본다.  


여기서 우리는 아들의 손을 놓아야 했다.  

14시에 다들 모였고, 5분이 지나자 입영하는 아들들을 모두 교회 밖으로 불러냈다. 같이 온 가족 친지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오라고 한다. 


순간 아주 흔하고 쉬운 표현으로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입대하는 아들들은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수도 없이 뒤돌아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어떤 애는 아예 앞만 보고 간다. 고개를 숙이고 그저 걸어가는 애도 있다. 문을 나서면 18개월 동안은 내 자식이 아니고 나라의 자식이 된다. 강당 앞을 지나서 묵묵히 빠져나가는 아들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웃어야 하나 진심으로 웃을 수는 없고, 울고 싶으나 울 수는 없는 심정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알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다.

     



코로나때는 입영식과 수료식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 입영식 장소는 부대 내 체육관이다.

교회에서 30여 분을 기다리다가 실내체육관으로 이동했다. 당초에는 부모님들만 입영식을 직접 관람하고,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서 빔으로 보여주는 중계방송을 본다고 했었다. 그러나 교회내에 있던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면서 서성대더니 그대로 전부 체육관으로 이동을 해버렸다. 우리 가족은 당초 예고한대로 교회내에서 기다리다가 이동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맨 꼴찌로 이동을 했다. 이미 체육관은 만원이었다. 입영식은 봐야하기에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삐집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체육관에는 오늘 입영하는 장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몇 시간 사이 아들들은 장병이 되어 있었다.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차려 자세를 하고 있는 모습, 열과 오를 맞춘 모습들이 조금은 어색하게 보이지만 나름 꽤 늠름하게 보였다. 왠지 모를 포스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우리 부부는 인파 속의 틈을 겨우 비집고 2층 제일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와 떨어진 딸들은 어쩔 수 없이 2층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첫째가 나에게 손짓 신호를 준다. 바로 앞을 가리킨다. 아들이 전체 대열의 맨 마지막에 서 있었다. 바로 우리 앞이었다.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위치였다.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 아들 찾기에 바빴다. 다 빡빡머리에 대부분 검은 옷을 입을 터라 뒷모습, 옆모습만 보고서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찾아도 얼굴을 서로 알아볼 수가 없는 환경인데, 우리는 아들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소리를 치면 알아볼 수 있는 거리다. 2층 난간에 기대서 누나들이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불러대는 모양이다. 


오늘 한 200여 명이 입영한다고 한다. 

준비를 마치고 잠깐 쉬는 사이 객석의 부모님을 돌아보는 시간을 주었다. 부모님들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느라고 난리다. 밑에 있는 아들들은 부모님을 찾느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에 바쁘다. 우리는 다행이도 바로앞에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부르는 소리를 알아챘는지 아들도 우리 쪽을 향해서 웃는다. 아내도 아들과의 아이컨택에 이내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입영식은 군악대가 오고, 부사단장이 오더니 한 20분도 안 걸려서 간단히 끝났다. 

아들들이 돌아서서 객석을 향해서 부모님들께 마지막으로 거수경례했다. 하는게 제법이다. 몇 시간 사이에 벌써 군기가 들었다. 그리고는 내무반으로 들어간다. 이젠 진짜 헤어짐이다. 


아들하고는 특별히 사연이 많은 아내다. 


아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내 훌쩍인다. 어젯밤에 오늘 헤어지면서 서로 울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하던데 그건 다짐뿐이었다. 


아들하고는 특별히 사연이 많은 아내다. 

둘째를 낳고 거의 10년을 기다렸다가 아들을 낳고 싶다고 해서 얻은 아들이다. 과정에서 장모님, 처형, 아내가 많은 사연을 품은 녀석이다. 대학교 기숙사로 이사를 하고서는 얼마간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아주 힘들었다는 아내다. 그래서인지 아들도 틈만 나면 엄마에게 전화했다. 전화가 오면 20~30분간은 무슨 얘기를 함인지 한참 속닥이다가 끝이 나면 얼굴빛이 달라지는 아내였다. 입대를 위해서 서울로 간 10여 일간 동안도 매일 같이 전화했었다.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 커서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과 맘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아들은 사교성이 있고, 적응력이 좋아서 조직이나 단체 생활하는 데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르는 것이라 부모이기에 걱정이 앞선다.   


입영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아들의 얼굴은 얼마간은 볼 수 없다. 아내는 마음이 안정되지가 않는 모양이다. 연신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간다. 입대하는 아들들이 줄을 서서 막사 건물로 들어간다. 모두 다 화이팅을 해주고 싶었다. 모두다 군 생활 동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성숙해져서 훌쩍 커버린 사람이 되서 돌아오기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슬픈 현실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가져왔던 소중한 것을 내주고 간다.
옆이 시리다.


아들을 맡기고 돌아서는 길이다. 

당초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돌아서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나 내가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와 나는 곧장 제주로 향하기로 했다. 뒤숭생숭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환경이라도 편해서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이어서다.

 

3시 반이 되어가는 시간이다. 퇴근 시간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카카오택시로 노원역까지 왔다. 여기서 가는 길이 다른 딸들과는 헤어졌다. 딸들도 한동안은 적적할 것이다. 아들은 방학 때나 휴일에는 누나 집에서 다정한 막둥이로 때로는 친한 친구로 같이 동고동락했다. 동생에 대해서는 각별한 누나들이기에 오늘 일은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아무 탈이 없이 비행기가 제때 가야 하는데.." 서울 올때 비행기편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내려가는 편도 걱정이다. 당초 입영식이 시간이 꽤 걸릴중 알고 내려가는 편을 넉넉하게 8시 30분 마지막 편을 예약했었다. 

택시로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많이 단축됐다. 공항에 오고 보니 6시다. 당초 예약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예약시간을 변경했다. 다행히 좌석이 여유가 있어서 얼마간의 수수료를 내고 변경할 수가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행기에 탑승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아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당분간은 휴유증이 있을 것같다. 

나도 그냥 쉬고 싶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어제오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내가 입대하던 43년 전 나의 오늘이 떠오른다. 


제주공항에 내렸다. 

억수로 비가 온다. 조용한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공항마저 적적하다. 내 마음이다.  

늦둥이 아들이 입대하는 날, 제주의 하늘도 하루 종일 울었다. 


빗소리는 내 마음의 빈 곳을 채워주려는 듯 세차게 내린다. 

이제 아들은 549일이 지나야 찾을 수 있다. 오늘도 잠에서 깨자마자 THE CAMP APP을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찌할 수 없다. 보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