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60대 중반이다. 인생의 초반은 서귀포에서, 그 후반은 제주시에 살고 있다. 거의 정확히 반반이다.
서귀포에 어머니가 살고 있기에 지금도 한 달에 몇 번씩은 산 넘어 서귀포를 찾는다. 가는 길은 승용차로 1시간 내외다. 딸들이 보내준 캡슐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려서 보온병에 담고, 냉장고를 뒤져서 어머니께 드릴 반찬을 찾아서 챙기면 서귀포 갈 준비는 완료다. 아내는 서귀포를 갈 때면 항상 뭐라도 챙겨서 갖다 드려야 편하다고 한다. 갖다 드릴 게 없는 날은 아내가 서귀포행을 머뭇거리기도 한다. 이게 시댁에 대한 부담인가 하고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젠 한 30년이 넘었으니 그리 안 해도 될 만 한데 말이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은 항상 설레는 기분이다. 고향집과 어릴 적 추억을 찾아가는 기분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면 낯선 익숙함에 당황하던 적이 여러 번 있다. 내가 살던 시절은 11자 자가용이 주된 이동수단이었다. 어디를 가든 길이 막힐 곳이 없었다. 이젠 주된 이동수단은 승용차다. 내가 살던 서귀포 구 도심지는 대부분 중앙선을 못 그릴 정도로 좁은 이면도로라 일방통행도로가 되어버렸다. 어디를 가든 막힌다. 일방통행로를 잘못 들어가서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건물들도 새로 들어선 것보다는 구도심이라 증축하고, 덧칠한 게 대부분이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초보자가 좁은 공간에 크고 작은 물건들을 서툴게 쌓아놓은 느낌이라고 할까, 뭔가는 굉장히 불안하고 어색하다.
나의 서귀포시대, 나는 서귀포시내의 중심지 지금은 중앙동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살았다. 예전에는 남주중, 고등학교가 있었고, 천주교 복자성당이 있던 거주 중심지 였다. 지금은 매일올레시장이 확장되면서 주위가 많이 변했다. 매일올레시장의 주차빌딩이 있는 곳 맞은편 "매일 올레돈"이라는 음식점이 있는 장소가 내가 살던 곳이다. 몇 년 전에 내가 살던 집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서 음식점을 개업한 것 같다.
어린 시절 부엌에 앉아서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나를 부른다.
"야! XX 야, 아궁이에 불을 봠시라이, 요 앞에 금방 갔다 오키여" 목소리의 메아리와 함께 사라진다.
(제주어: 아궁이에 불을 보고 있어라. 앞에 금방 갔다 올게)
물을 솥에 부어놓고 아궁이에는 장작불을 떼놓은 상태다. 방금 다녀오신다던 어머니는 물이 펄펄 끓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좀 있다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어머니의 손에는 저녁 반찬거리인 듯한 각재기나 고등어 몇 마리가 달려있곤 했다. 식사를 준비하다가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다녀와도 될 정도로 우리 집과 매일시장과의 거리는 가까웠다. 시장은 우리 집 반찬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가끔 매일올레시장을 갈 때면 그 시절이 아련하기만 하다.
내가 살던 집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남쪽 바닷가로 내려가면 정방폭포가 나오고, 서쪽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천지연 폭포가 나온다. 폭포 근처에는 당시 서귀포에서 가장 고급 숙박업소인 서귀포 라이온스 관광호텔과 파라다이스 관광호텔이 있었다.
내가 어릴 적 보았던 서귀포 최대, 최고의 호텔은 라이온스 관광호텔이다. 1971년 호텔 등록을 한 제주도 남부지역 최초의 관광호텔로 당시 제주도 최고급 호텔이었다. 30여 년간 서귀포 관광산업과 영욕을 같이하며 서귀포발전에 이바지한 곳이다. 천지연 상류지역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텔에서는 바닷가 전망은 막히는 게 없어서 서귀포항과 뱃머리동산, 새섬, 문섬, 저 멀리 바닷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역대급 조망이다.
서귀포 라이온스 관광호텔 모습 (서귀포시 공보실 소장)
관광도시라는 제주에도 관광호텔은 몇 곳 없던 시절, 그 이름조차도 매우 낯선 때였다. 호텔이라는 이름도 거리감이 있지만 호텔의 규모가 서양의 현대식 건물로 위압감을 느낄 정도의 규모였고, 밖에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구조라 그냥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다. 호텔 현관에서 근무복 정장에 모자를 쓰고 방문객을 맞이하는 벨보이의 모습도 낯설다. 관광호텔이라고 하길래 관광객만 들어가는 곳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지나가면서 멀리서만 볼뿐 들어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 금기를 깬 것이 아마 1970년대 말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에 사시는 외삼촌이 고향방문으로 제주에 왔을 때 이곳에 숙박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호출을 받고 호텔 로비까지는 어찌어찌 들어갔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치만 나는 관광호텔이라는 게 숙박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시설이나 규모를 자랑한다는 느낌이 있어서 별로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내가 라이온스호텔을 기억하는 것은 입구 왼쪽에 있었던 나이크클럽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1980년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지런히 동네를 누비던 시절이다. 자유방임의 나날을 보내던 그때, 지금은 매일올레시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였지만 예전에는 매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매일매일 장이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장 안 사거리에서 서귀포전화국(kt 서귀포지사) 방향으로 조금만 오면 주막집 몇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지금 기억하기론 경 민이네집, 통나무집 이런 곳들이다. 돈이 없던 시절 안주하나에 소주 한 병이면 3~4시간을 거뜬히 버틸 수 있던 때였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소주 한잔을 하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80~90년대 호텔 나이트클럽들이 성시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귀포에는 나이트클럽이 없었다. 아마 라이온스호텔에도 처음에는 나이트클럽이 없었는데 나중에 붐을 타고 클럽을 오픈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내가 직장을 잡고 제주시로 주 무대를 옮기기 전까지 서툰 댄스실력으로 비비작 거리기 위해서 열심히 드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원래 라이온스 호텔 주변에는 건물이나 상가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교통량도 적고, 도로도 협소한 편이었다. 90년대 이후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로가 정비되고 근처에 교통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호텔 아래에 있는 천지연 절벽들이 크랙이 생기고 낙석이 발생하면서 천지연재해위험지구로 지정이 되었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진행된 정비사업으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라이온스호텔은 2003년 철거되어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현재는 시민공원과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조성이 되어 시민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바닷가로 훤히 트인 전망을 조망할 수 있다. 가끔 이곳을 지날 때면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나이트클럽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서귀포 하니문하우스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80~90년대만 해도 연인들이 데이트는 그리 공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은밀살짝하게 데이트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시절이다. 하니문하우스는 낭만과 아름다움, 숲 속 정취와 오시록함이 있는 곳이다. 정방폭포 근처로 지금은 폐업한 소라의 성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길이 정석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건축가인 고 김중업 씨가 설계한 작품으로 알려진 소라의 성은 예전에는 레스토랑과 식당으로 연인들의 은밀한 데이트장소 이기는 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걸어서 소정방폭포위에 있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울퉁불퉁 조그만 숲길이 나온다.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숲 속 나무사이 여기저기 숨어있는 나지막하고 아담한 건물이 나온다. 여기가 하니문 하우스다. 이름은 파라다이스호텔과 하니문하우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사용을 했던 것 같다. 파라다이스는 이 호텔을 운영했던 그룹의 실제 이름이기도 하다. 주로 서귀포 사람들이 기억하기로는 하니문 하우스로 기억을 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해안선을 품고 지중해풍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호텔이라고 해서 높은 게 아니고 야자수와 나무가 우거진 숲 속 아담한 건물이다. 웨딩사진 촬영의 명소로 서귀포 시민이면 누구나 한가지씩의 추억은 가지고 있는 곳이다. 당시 유명한 연예인들도 한 번쯤은 방문했던 곳이다. 전설의 드라마 여로의 주인공인 장욱제 씨가 운영한다고 소문이 났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파라다이스 호텔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겨울별장으로 유명한 곳으로 1960년 4.19 혁명 이후 정부 소유 호텔로 바뀌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도 일시적으로 사용하다가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70년대 파라다이스 그룹이 인수해 "허니문하우스호텔"로 운영했다. 지중해풍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한 곳이다. 2008년에는 한진그룹에서 인수를 했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서귀포 KAL 호텔과 연계를 해서 개발을 한다는 발표가 있었으나, 10년이 넘도록 진행이 안되고 있고 20년에는 매각을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바닷가 쪽에는 카페와 야외 정원이 있다. 소정방폭포로 이어지는 칠십리 바다와 섶섬, 문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제주 제일의 해안 절경과 유럽풍의 예술적인 건축물,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산책로가 조화를 이루는 제주의 옛 명소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바닷가 해안길이 올레 6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정방폭포를 지나 서귀포 KAL 호텔 남측을 지나는 길이다. 올레 코스인 만큼 공개되고 방문객이 많은 곳이 되었다. 지금은 허니문하우스 카페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커피숍이었다. 바닷가를 보면서 차 한잔을 할 수 있었던 시간과 벗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