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정구역상으로는 중앙동이라고 한다. 위치상으로는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공영주차장이 있는 바로 북쪽 지금 xx올레돈이라는 음식점이 있는 곳이다. 내가 살던 집 맞은편, 지금 공영주차장에는 천주교 복자성당이 있었다. 지금은 주위가 완전히 상가지대로 변했지만, 내가 살던 1987년까지만 해도 이 동네는 일반 주택가였다. 동네에 상가는 조그만 구멍가게와 동네 이발소가 전부였다.
내가 살던 집에서 서쪽으로 한 블록 더 가면 공영주차장이 나온다. 예전에 남주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조선시대 서귀포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서귀진성이 있었다. 지금의 솔동산과 서귀포 초등학교 사이 동산이다. 여기서부터 동명백화점 앞 까지는 솔동산이며 서귀포극장 오르막길과 같이 주위가 온통 오르막 내리막 동산으로 되어있다. 반면 동명백화점에서 한라산 방향으로는 너른 들판으로 밭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이 뱅듸, 평지다. 서귀진성을 중심으로 서귀포 항을 앞으로 봤을 때, 서귀진성의 뒤쪽에 있는 넓은 지역이라고 해서 속칭 "뒷뱅듸"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주는 자연생태를 한라산, 오름, 곶자왈, 습지, 용암동굴, 해변, 하천, 뱅듸로 구분한다. "뱅듸"는 너른 들판을 의미하는 제주어다. 이러한 뱅듸는 도내 마을 곳곳에 있다. 그 동네에서 비교적 넓게 밭이나 들판이 펼쳐져 있는 지역을 그냥 앞에 위치를 붙여서 ㅇㅇ뱅듸, XX 뱅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기는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다. 당시만 해도 내가 사는 동네는 농사를 짓는 밭들이 많았고 몇 채의 주택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특징은 한 필지가 굉장히 큰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반경 100M 정도 내외에 있는 넓은 땅들의 주인은 달랑 3명이었다. 윤 xx 씨, 부ㅇㅇ 씨, 김 oo 씨다. 우리 가 살던 집의 땅 주인은 학교 교장과 교육장을 지냈던 제주도 교육계의 높은 사람이었다. 당시에 이 동네는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게 아니고 대부분 땅은 빌려서 집을 지어서 사는 구조였다. 좀 특이한 경우다.
매년 토지임대료를 낼 때쯤에는 주인이 나타나서 받아가기도 했다. 토지임대료를 많이 올릴 때는 서로 다투기도 했다. 같은 땅주인에게 임대료를 내는 사람들은 "올해 얼마를 더 달라고 한다"는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토지임대인인 "을"로써 땅 주인인 "갑"에 대항하기 위하여 단결된 모습을 보이기도 해야 되기 때문에 동네사람들 간의 정은 굉장히 돈독한 편이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웬만한 동네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고, 일이 있을 때 서로 교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 돈독한 동네였다. 그곳을 떠난 지가 지금 35년이 넘어가는데 생존해 있는 분들끼리는 지금도 안부를 묻고 교류하고 지낸다.
내가 살던 집의 바로 앞( 나중에 성당이 들어오지만, 지금은 공영주차장이 있는 곳)은 동네 대지주인 부씨네 집에서 농사를 하는 밭이다. 크기가 지금의 공영주차장과 동쪽 끝 시장경계까지였으니 크기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게 한필 지다. 당시 밭경계는 숙대낭(삼나무)이다. 우리 집 난간에 서서 밭을 보면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널려있는 시장 좌판으로 보일 때도 있다. 간식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던 시절이다.
그 밭의 작물들을 특이하고 낯설고 고급스러웠다. 당근, 양파(그 당시 우리는 다마네기라고 함.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말이었다), 토마토, 오이, 가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좀 생소한 작물을 재배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씨집에는 자식들이 많았는데, 대학교를 나온 아들들이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에서 농산물(당근, 양파, 토마토...)을 슬쩍.. 서리해 먹던 추억..
뭐든 하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중2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당근이나 양파는 비싼 것이어서 맘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널려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은 사치요 낭비였다.
조금 어두워지면 동네 친구들과 같이 숙대낭 사이에 숨는다. 신속 정확이 생명인 서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때 용어로 작전을 짜는 것이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일 때쯤, 아니면 주인이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기다린다. 작전이 개시되면 슬금슬금 기어가서 재빠르게 당근이나 양파를 뽑는다. 그때는 밭옆에 농사를 짓고 모아둔 보리집으로 만든 우리들의 아지터인 "본부"가 있었다. 서리를 성공한 사람들은 재빨리 본부로 귀환을 하고 몰래 숨어서 킥킥거리며 나눠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먹는 게 다 부족했던 시절이라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배를 채울 수 있는 거면 다투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당근은 주인 몰래 뽑고 풀에 흙을 슥슥 비벼서 털고 생채로 한입 와싹 씹으면 향긋한 냄새와 달콤한 맛이 말 그대로 죽여준다. 지금도 당근을 보면 그 맛이 생각나는데 요즘 당근에서는 그 맛과 향기가 없다.
양파도 생채로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서리의 주요 대상이었다. 작은 양파, 그리고 양파를 벗길 때 양파의 한 겹 두께가 좀 도톰한 것이 생채로 먹기에 맛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엄청 매운 걸 만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의 눈물이다. 눈물을 닦으면서 먹다가 어른들에게 발각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값비싼 환금작물인 토마토나 오이를 재배할 때는 주인아줌마가 바짝 신경을 쓴다. 열매가 열릴 때쯤이면 아들들도 와서 보초를 서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의 작전이 거의 통하지를 않았던 것 같다. 그 집 아들들은 체격도 크고, 군대도 장교출신들이었다. 서리하다가 걸려서 집까지 끌려온 전적도 있다. 사실 부씨네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로 성당 지을 땅을 내줄 정도로 넉넉한 분들이라 서리를 하다 들켜도 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무나 먹고 싶고, 맛들이 궁금한 과일이었기에 동네 아이들이 무리를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게 밭주인집 아들이었다. 나보다 1년 후배 남자아이다. 그 친구는 집에 형들이 많아서 위에 사람이 얘기를 하면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딱지를 주고, 구슬을 줘서 토마토 몇 개, 오이 몇 개와 바꿔먹던 적도 있었다.
보리찝 단으로 만든 동네아이들의 본부.. 지치면 스르르 잠이 들기도
동네 꼬마 녀석들의 전용 놀이터는 토마토가 열리는 바로 옆 밭이었다. 주로 보리농사를 하는 밭이었다. 나중에는 없어졌지만 밭 가운데는 산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리 농사철이 되면 보리농사를 하고 지나면 그대로 방치했었다. 그러니 보리농사를 할 때 빼고는 우리들의 놀이터가 된다. 탈곡 후 보리집을 쌓아둔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보리집 단을 쌓아서 비밀공간을 만든다. 바람도 안 들고 춥지도 않게 밀폐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우리들의 본부다.
보리는 탈곡을 잘하노라고 했는데 고고리(보리 꼬투리)에 보리 알맹이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완전히 횡재를 한 경우다. 불을 지피고 보리 고고리를 불에 넣으면 보리가 익으면서 까맣게 탄다. 꺼내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완전 별미다. 고고리 하나에는 제법 여러 개의 보리알이 달려있다. 한 알 한 알 뜯어내면서 씹어 먹자면 옆에 있는 친구들이 달려든다. 엉겁결에 먹다 보면 입은 숯댕이를 먹은 듯 새까맣게 변해 있는다.
잘 만들어진 본부는 동네아이들의 대장놀이, 전쟁놀이를 하는 장소이고, 우리들의 피난처였다. 학교 다녀오고 애들이 하나둘 모이면 산소 위를 뛰어넘고, 온 동네를 휘저으면서 전쟁놀이를 한다. 지치면 이 공간에 와서 잠시 쉬었다 간다. 따뜻한 공간이라 어떤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이 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가로등도 없고 바깥 외등도 없는 시절이다. 달빛에 의지하며 놀았다. 동네 부모님들은 이곳에 뭔가가 생기면 애들이 또 저기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저녁 먹을 시간 애들이 안 들어오면 저만치 집 입구에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불러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