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대지주인 부씨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들의 소유이자 동네아이들의 식량 창고였던 앞 밭에 어느 날 뭔가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참 후 "천주교 복자성당"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인터넷으로 이력을 검색해 보니 그게 1970년 11월이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다.
사실 그때 나는 성당이라는 것은 처음 보았다. 교회는 듬성듬성 많이 보였으나 주위에 성당은 없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서귀포에 성당은 솔동산 근처에 유일하게 있었다고 한다. 성당은 규모도 큰데 외국인이 자주 보였다. 신부였다. 신기한 마음에 말도 붙여보고, 할 일없이 기웃기웃하면서 놀러 가보기도 했다. 언제나 신부님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아침마다 신선한 두부를 제공해 주던 집 앞 두부공장 그때 추억이 남은 듯 지금도 콩국은 내 최애 음식 중 하나다.
성당이 지어지고 사방의 울타리가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지기 전, 성당 건물 맞은편에는 조그마한 초가집이 있었다. 우리 집 정지(부엌) 바로 맞은편이다. 나이 드신 할머니 부부가 직접 운영하는 두부공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부는 흔치 않은 먹거리였다. 처음 본 것 같기도 했고, 사실 두부는 비싸기도 했다. 공장은 거의 매일매일 가동을 하고 두부를 만들었다. 아침이면 굴뚝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나온다. 할머니가 두부를 만들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신호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 집까지 잘 익어가는 콩의 냄새가 날아 들어온다.
"흑흑, 이거 무슨 냄새지?"
낯설고 맛 좋은 냄새에 우리 가족들은 코를 끙끙거리면서 냄새나는 곳을 찾아보기도 했다.
두부를 만드는 콩은 삶는 과정에서 조금 비린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기에 예민한 우리 형제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금방 나온 따끈따끈한 물두부의 맛은 안 먹어본 사람은 모른다. 그냥 후루룩 하면 한 사발이 사라진다.
주로 술로 식사를 하고 안주를 전혀 안 하시는 내 선친도 물두부 한 그릇은 언제나 오케이 "마파람에 개눈 감추듯"먹어 치운다.
콩물을 짜고 남은 콩비지도 하는 음식도 맛있다. 어머니는 음식을 잘 만드신다. 두부공장 할머니가 갔다 주시는 물두부는 아버지 몫이다. 형제가 많은 우리 가족들의 식사를 위해서 어머니는 비지를 가지고 배추를 넣어서 콩비지국을 끊인다. 제주의 고유 음식인 콩국과 비슷한 모양이다. 나는 맛있었다. 그때 추억이 남은 듯 지금도 콩국은 내 최애 음식 중 하나다.
할머니의 두부공장은 이른 시간에 시작이 된다. 우리 가족이 아침을 준비할 때쯤이면 콩비지나 물두부가 나오는 모양이다. 시간이 있으면 할머니가 직접 가져다주신다. 바쁘면 길건너에서 할머니가 부르면 달려간다. 그때는 길에 다니는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라 길을 조심할 필요도 없다. 자다 일어난 내의 바람에 아무 신이 나 질질 끌고 가면 된다. 지금도 그때 따끈한 물두부와 콩비지의 냄새와 향기는 잊을 수가 없다.
인자하기만 한 외국인 신부, 시멘트 블록담 위에서 놀기.. 여자애들이 보는 앞에서 폼을 잡기에는 딱이었다.
" 조심하세요! 떨어지면 다쳐요.."
조금은 어색하고 더듬더듬한 한국말로 신부님이 성당 블록담 위를 바라다니(*제주어: 돌아다니다로 담장과 같이 좁고 높은 곳을 걸어 다니다의 제주어 표현)는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외국인이라 이렇게 친절한가? 아니면 성당 신부라서 친절한가? 도대체 성당 안에서 말썽을 부리는 우리에게 욕을 하는 법이 없다. 성당이 다 지어지면서 우리에게 중요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내 코를 자극하던 두부공장도 없어졌다. 그리고 성당의 외곽은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시멘트 블록을 쌓아서 경계를 만들었다. 밖에서 볼 때는 거대한 철옹성이 된 거다.
담장의 높이는 위치에 따라서 1M~2M 정도가 됐던 것 같다. 우리가 섰을 때 안이 보이는 곳도 있었고, 안 보이는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탁 트여있던 성당은 외부에서 진입이나 조망이 불가능하게 사방을 돌아가며 시멘트 블록으로 막아버렸다. 입구에는 큼지막한 철제 대문을 달았다. 이젠 우리의 놀이터자 식량창고를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뒷뱅듸 개구쟁이들은 아니다.
당시 동네 집이나 밭들의 경계는 모두 돌담이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고 제주도 대부분에서 경계표시가 돌담이었을 것이다. 울퉁 불퉁하고 날카로운 돌담은 튀어 넘거나, 돌담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다. 그러나 새로 생긴 성당의 시멘트 블록담은 달랐다. 1M 정도 되는 블록 담 위에 손만 닿으면 휙 튀어 넘을 수가 있었다. 벽돌 위가 평평한지라 걸터앉거나, 그위를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개념 놀이터를 하나 발견한 것이다.
국민학교 때라 몸이 가볍고 작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면 벽돌담 위를 제주말로 바라 다니면서 놀았다. 약간의 스릴도 있고, 아슬아슬하기도 하고해서 여자애들이 보는 앞에서 폼을 잡기에는 딱이었다. 앞에 뛰는 사람 잡기를 하거나, 벽돌담 위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 낙상의 위험과 신체 부상의 위험성을 있는 놀이였다. 특히 벽돌담 바로 아래가 쓰레기와 돌, 시멘트 조각들이 쌓여 있는 곳이기에 떨어지는 날에는 중상이었다. 지나가는 어른들은 우리를 보곤 내려오라고 타이르다가 결국에는 욕을 하면서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당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주의를 줄 뿐 욕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경고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깨달은 듯 얼마 되지 않아서 벽돌 위에는 새로운 뭔가가 추가되어서 영원히 놀이터를 빼앗아 갔다. 그때는 참 야속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집 앞에 뻥튀기 할아버지가 있다. 뻥튀기의 추억
나는 뻥튀기 튀밥이나 강냉이를 무척 좋아한다. 지금도 오일장을 가면 뻥튀기 가게 앞에서 눈 꼭 일단 발길을 멈추고 서성거린다. 예전의 향수를 그리워함이다. 당시 우리 집 앞에는 뻥튀기를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성당의 벽돌담과 옆밭의 울타리 사이 조그만 공간에 있는 임시 뻥튀기 공장이다. 이동식으로 뻥튀기 기계를 설치하고 동네사람들의 주문을 받아서 강냉이나 튀밥을 만들어 주었다. 당시 최고의 간식거리가 아니던가? 뻥튀기는 워낙 소리가 세기 때문에 일반 주택가에서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적당한 곳을 찾다가 마침 그 장소옆에 넓은 공터가 있어서 사람이 살지 않고, 성당옆이라 신부님이 이해를 해주실 것 같다는 생각에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것은 그 바로 앞에 있는 우리 집이다. 어느 날 허름한 할아버지가 소주 한 병에 쌀을 튀운 튀밥을 한 바가지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우리 선친보다 조금은 위인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뻥튀기 할아버지였다. 내 선친은 허허실실 한 분이라 누구에게 나쁜 말을 못 하시던 어른이다. 오셔서 소주 한잔 하시면서 얘기를 풀어놓으시니까 아버지는 그냥 오케이를 한 모양이다. 선친은 밥보다 술을 좋아하시던 어른이다. 술이면 세상만사 술술이다.
이제는 동네가 시한폭탄을 품은 곳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시한폭탄이 터진다.
"뻥이요" 진짜 요란하다.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한 움큼 떠오른다. 폭탄이 터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놀랄까 봐, 할아버지가 "뻥이요"를 외치면서 작업을 했다.
뻥 할아버지들은 애들이 보는 앞에서는 장난으로 "뻥이요"를 외치다가,
재미를 붙이고 난 후에는 홍보겸, 놀람을 방지하기 위해서 "뻥이요"를 외쳤던 것 같다.
요즘 뻥튀기가 제일 많은 오일시장에서는 "뻥이요"를 외치는 소리가 없다. 소리 없이 뻥튀기가 생산이 된다.
뻥튀기 기계의 소리도 소음기를 달았는지 들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뻥튀기 기계가 자동화됐다는 얘기도 있다. 이젠 박물관에서 찾아야 할 날도 멀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뻥"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랐다. 그때 "뻥"이라는 소리가 안 좋았던지 우리 형제들 중에 는 "뻥" 치는 애들은 없다. 조금의 뻥은 필요한데 말이다. 대신 우리는 매일 강냉이와 쌀로 튀긴 튀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뻥 할아버지는 매일마다 결산을 하면서 남은 것들은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
매일 아침이면 뻥튀기 할아버지는 짐을 한가득 가지고 왔다. 짐을 풀고 세팅을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어떤 날은 무거운지, 귀찮은지 짐을 정리해서 방수갑바를 씌우고 몸만 달랑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우리 집에 와서 선친과 소주를 한잔하고 가신다. 그런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자리에는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