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는 곳은 서귀포에서 유일하게 논이 있는 동네다. 물과 도랑이 있어야 미꾸라지가 서식하는 법, 최적지는 하논과 선일 포도당 공장 근처의 논이다. 가끔씩 선반내에 목욕하러 갔다가 주위에서 헌팅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내가 살던 뒷뱅듸에서 하논까지는 꽤 먼 거리다. 가는 코스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여유롭게 잡아서 편도로 2~3km나 되는 거리다. 당시 국민학생이 다니기에는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나는 어떻게 집에서 그리 먼 장소를 알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 되짚어 보기에는 이렇다. 시차를 달리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하논과 선반내 인근에 부모님이 경작하던 밭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학교를 안 가는 날이면 부모님을 따라 종종 밭에 가서 일을 도왔다. 아마도 그 길을 따라나서면서 하논과 선반내 가는 길을 익혔던 것 같다. 혹시 선반내는 어머니나 누나가 빨래를 하러 갈 때 따라가면서도 익혔을 리도 있는 곳이다. 지금 생각하니 어느 곳을 가던 가깝지는 않은 길인데 멀리도 다니면서 꽤나 개구쟁이 짓을 한 것 같다.
동네에서 주워서 만든 낡고 허름한 그물망 하나면 미꾸라지 잡이는 오케이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동네에서 국산품 애용이라는 경품이 성행하던 때라 그때 당첨돼서 받아온 사각형의 조그만 소쿠리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나가다는 눈치 빠른 어머니한테 걸리기 일쑤다. 그러면 영락없이 심부름을 하거나 형제 많은 집이라서 동생들을 봐야 한다.
그냥 집 밖을 기웃기웃 거리다가 슬쩍 나와서 냅다 달린다. 동네 먹구술나무 아래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쳐서 출발한다.
당시에는 미꾸라지를 잡아서 담아 올 그릇인 적당한 빈용기가 없었다. 집에서 냄비를 가져올 수도 없다. 아버지가 즐겨마시던 술병은 병 주둥아리가 너무 작아서 큰 미꾸라지를 담을 수 없다. 그렇다고 살짝 도망 나오는데 10홉짜리 큰 대병을 가져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처음에 미꾸라지를 재미로 한두 마리 잡을 때는 문제가 안되지만 하논 정도에 가서 도랑에서 미꾸라지들을 본격적으로 잡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 용도로는 병원에서 나오는 링거병이 제격이다. 집에서 하논으로 가는 길 중간지점에 당시 서귀포 보건소(지금의 서귀포시 평생학습관건물)가 있었다. 보건소 뒤편에는 지금과는 달리 온갖 의료쓰레기를 모아서 버리는 쓰레기장이 있다. 여기 가면 링거병을 구할 수가 있다. 직원에게 걸리지 않도록 후문으로 들어간다. 링거병은 고무튜브와 주사기까지 연결된 채로 너부러져 있다. 피 묻은 각종 쓰레기들을 피해 링거병중 가장 큰 병 하나를 주워 들고 튀어나온다. 튜브와 주사기를 제거할 틈도 없다. 의기양양 병을 움켜 들고 보건소에서도 1KM 이상은 걸어야 목적지인 하논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과 달리 당시 하논은 전부 논이었고 거의 실제로 농사를 했다. 하논은 워낙 넓고 커서 사람들을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 논에는 개구리 알들이 많다. 가끔은 물을 대는 도랑에서 물 따라 들어간 미꾸라지 새끼들이 길을 잃고 있는 경우도 있다.
미꾸라지는 논에 물을 대는 논과 논사이 도랑과 수로에서 잡는다. 도랑은 물이 얕고 폭이 좁기 때문에 바지를 걷고 직접 들어가서 손으로 잡는다. 돌을 움직이거나 풀사이를 막대기 같은 것으로 저으면 미꾸라지들이 놀라서 뛰어나온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대부분 흐르는 물이라 확률은 적은 나 가끔씩은 이끼가 끼어있는 돌에 미끄러져 입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날이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한소리를 들어야 한다.
수로는 폭이 더 넓고 물이 많다. 논과 논사이, 또는 도랑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한다. 수로 양옆은 갈대와 풀로 밀집된 오시록한 분위기라 뭐가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미꾸라지들이 서식지로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미꾸라지를 잡는 방법은 2가지다.
주로 폭이 넓은 수로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친구들과 미꾸라지 몰이를 하는 것이다. 하천에서 턱이 지거나 폭이 좁은 곳에 가지고 간 그물을 쳐놓고 위에서 친구들이 막대로 수풀과 돌을 때라면서 그물이 있는 데까지 미꾸라지를 몰아오는 방법이다. 시끌벅적 재미있는 짓이다. 이때는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잡은 미꾸라지를 나눠 갖는다.
둘째는 조금 위험성이 있으나 큰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물망을 가지고 수로 양옆 갈대밭을 휘젓는 방법이다. 갈대밭 수풀 사이에는 미꾸라지들이 숨어있기 좋은 장소다. 큰 놈들이 많다. 반면 물은 흙탕물이라 바닥이 전혀 보이 지를 않는다. 그물을 물속에 넣고 갈대 사이사이를 한 바퀴 돈다. 어느 정도 되고 일어서면 그물에 몇 마리가 잡혀 있는다. 어떤 때는 미꾸라지만이 아니라 뱀들이 함께 올라와서 어린 우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신발이 젖지 않게 맨발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수로에 버려진 깨진 병조각에 다치는 경우도 있고, 갈대에 베이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아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에 가서 꼭 엄마한테 들킨다.
하논은 굉장히 넓다. 도랑과 수로도 많다. 특히 입구에 있는 수로에서 미꾸라지를 가장 많이 잡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꾸라지를 담는 그릇이 어느 정도 차거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가 우리들의 노는 시간이다.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해시계가 넘어가야 돌아선다.
이렇게 몇 시간을 놀았는데 미꾸라지를 못 잡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하논과 길하나 건너에 있는 곳으로 간다. 여기도 논이다. 하논에서 물이 내려오는 길로 아마 하논에 있던 미꾸라지들이 물길을 따라 같이 내려오는 듯싶다. 이곳은 포도당 공장하고 선반내하고 연결된다. 여기서 미꾸라지와 개구리를 잡으면서 선반 내로 간다.
마지막으로 선반 내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가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잡아온 미꾸라지는 빈 항아리에 넣어서 가끔씩 들여다보는 게 전부다.
잡아온 미꾸라지의 용도나 소비처는 없다. 당시만 해도 제주에서는 추어탕이라는 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식용으로 미꾸라지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장독보다는 좀 작은 빈항아리 하나는 미꾸라지그릇으로 어머니가 내주셨다. 내가 기특해서가 아니고 잡아온 미꾸라지가 여기저기 뒹구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 거다. 미꾸라지 잡이를 갔다 온 날 저녁이면 잡아온 미꾸라지를 슬쩍 미꾸라지 항아리에 부어놓고는 딴청을 부린다.
" 뭐, 먹지도 못 허는 미꾸라지를 매일 잡아당 뭐 할 거니? " 어머니의 일갈이 있기 전에 자세를 낮춰야 한다.
잡아온 미꾸라지는 빈 항아리에 넣어서 가끔씩 들여다보는 게 전부다.
이 항아리 속에 넣어두면 그만이다. 항아리 속 미꾸라지는 아마 최고 일 때는 족히 1~2백 마리 정도는 됐을 것이다. 그 큰 항아리 입구까지 미꾸라지가 찾으니까 말이다. 어떤 때는 미꾸라지 거품이 가득할 정도다.
미꾸라지 먹이는 정기적으로 주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멸치를 손으로 비벼서 줬던 기억이 난다.
나의 미꾸라지 잡이는 천재지변으로 미꾸라지들이 방생의 자유를 얻고 떠남으로써 끝이 났다.
당시 우리 집 마당은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마당 한견에는 수돗가가 있었다. 수돗가에 사용하는 물은 바로 앞 도랑으로 흘러내리도록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미꾸라지를 가득 담은 항아리는 물의 수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수돗가 옆 나무 그늘아래 두었다. 항아리는 뚜껑을 덮으면 산소가 공급이 안 돼서 미꾸라지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항상 열어 두었다.
어느 여름날 비가 무지 오는 날이었다. 뚜껑이 열린 항아리로 쏟아진 빗물은 넘치고 넘쳐서 미꾸라지들이 집단 가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항아리를 탈출한 미꾸라지들은 마당을 거쳐 수돗가 배수로를 타고 도랑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비가 그치고 마당에 나왔던 아버지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 미꾸라지 몇 마리를 보고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아마 그때 난 빈항아리를 보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난 미꾸라지를 잡으로 다니지 않았다.
그 후로 한참 후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강화도에 업무차 갔던 날, 처음으로 추어탕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