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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Nov 06. 2024

그건, 40년 동안 간직했던 즐거운 착각이었다

1983년 8월 어느 날의 기억


가끔 서귀포항을 가는 날, 앞에 있는 문섬을 볼 때마다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추억이라기보다는 순간 악몽이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한다.    

 


서귀포 앞 바다에는 4개의 섬이 있다.

보목리 앞바다에 있는 섶섬, 법환리 앞바다에 있는 범섬, 그리고 서귀포항에 있는 새섬과 문섬이다. 서귀포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홍동의 언덕배기에서 보면 바닷가의 4개의 섬은 4형제다. 바닷가를 걸어가기 위해 뚝뚝 돌덩이 하나씩을 놓은 징검다리 같기도 하다.

새섬과 서귀포항은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물이 빠지는 시간에는 섬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어릴 적 방파제 주변에서 보말(제주어:고메기)과 조개를 잡다가 물이 빠지면 재빨리 섬으로 상륙한다. 섬에서 놀고 삥이를 뽑다가 물이 들어오기 전에 다시 방파제로 급히 돌아오던 추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새연교가 섬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섬으로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새연교는 그 시절 나의 추억을 지워버렸다.

문섬은 서귀포항 바로 앞, 새섬보다는 더 바닷가로 나가서 있다. 육지에서 잡힐 듯이 보이지만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지금은 관광유람선이 문섬과 새섬을 비롯한 서귀포 해안 절경을 주위를 관광하고 있다.     

서귀포항에 있는 새섬과 문섬


 


1983년 여름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상황은 아련하다. 남녀 친구들이 여럿이 모였다. 날씨가 좋았다. 칙칙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보다는 햇빛이 있는 야외가 좋을 듯한 날이었다.

당시 전투경찰(그 후 의무경찰로 바뀜)로 서귀포항에 근무하다가 제대한 친구가 있었다. 선박 출입항 업무를 담당했었기에 그의 말로는 서귀포항이 내 손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친구다. 날씨도 좋으니 문섬으로 낚시를 가보자고 했다. 낚시는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아주 드문 행사다. 혈기가 왕성한 20대 초반 나이에 가만 앉아서 세월을 낚아야 하는 낚시는 체질에 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가끔 일탈도 필요한지라 의견이 쉽게 모였다. 급히 낚싯대를 빌렸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 하니 집에서 버너와 코펠도 챙겼다. 하도 썰이 좋아서 말로 한라산을 올랐다 내렸다 하는 친구인지라 낚시를 추진하는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다.


서귀포항에서 문섬까지는 지척이라 가까운 거리다. 5분여를 달려서 섬에 도착했다. 우리를 섬으로 태워다준 배는 오후에 다시 데리러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이제는 우리의 시간이다. 문섬은 전체가 바윗덩어리다. 서귀포항이 바로 보이는 바위에서 한참 동안 낚시했다. 여름철이라 덥기는 하나, 늘 만나던 친구들이라 조잘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초보 강태공들이 온 것을 물고기들도 아는 모양이다. 눈먼 물고기라도 잡아야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겠는데 바다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지금도 야외에서 먹는 라면의 맛은 일품인데, 당시별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라면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라면을 끓이는 코펠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라면을 먹었다. 라면 맛에 취하고,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빠지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시계를 보니 배가 온다는 시간이 훨씬 지났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배 때문에 평화롭게 있던 우리 일행들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연락해 볼 방법도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서로들의 얼굴을 보면서 걱정하다가, 심심하니까 라디오를 켰다. 당시에는 휴대용 카세트(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 겸용)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애들이 놀러 갈 때 가져가는 필수품이었다. 대부분은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듣지만, 산이나 바닷가에서는 일기예보를 들어야 한다.


라디오를 켜자마자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연이어 긴박하게 들리는 멘트에 일행 모두는 순간 멈춤을 했다. 민방위훈련 날이 아닌데, 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매월 15일에는 민방위훈련을 했다. 시간이 되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정해진 멘트가 나온다. 남자의 긴급한 톤으로 “지금은 연습상황입니다. 경계경보입니다, 공습경보입니다….” 하고는 행동 요령이 나온다. 매월 민방위 날에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으로 우리귀에 익숙하기를 넘어서 귀가 닿도록 들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달랐다. 더욱이 오늘은 민방위 날이 아니다. 아나운서는 “실제상황입니다”를 반복하더니, “지금 미그기가….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실제상황…. ”이라는 멘트를 연속해서 긴급한 음성으로 전했다. 실제상황이라는 소리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짝 얼어붙었다. 앞에 반복되는 실제상황이라는 소리만 들릴 뿐 다음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실제상황이면 전쟁 상황이라는 얘기인데…. 그럼 북한군이 넘어온 거, 그럼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되지? 그래서 배는 우리를 태우러 오지 않는구나. 그럼 꼼짝없이 여기 갇히고…. 불길한 생각에 얼어붙어서 한참이나 짧은 순간이나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니 할 말 없이 모두 굳어버렸다. 나중에 상황방송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를 어떻게 기다렸는지도 기억이 없다.     

얼마 지나서, 멀리서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고 왔던 배의 모습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우리는 배에 올랐다. 오는데 잠깐 선장님의 해설을 들었다.

”서해 상공으로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는데 실제상황으로 오인해서 방송했다고….”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맥이 풀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아무 생각 없이 헤어졌다. 아찔하고도 허탈한 시간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날 실제상황이 이웅평 소령이 미그기를 몰고 오던 그 날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 TV 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웅평 소령이 귀순한 것은 1983년 2월, 겨울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나는 여름이었는데, 이상한 생각에 사진첩을 꺼내서 사진을 봤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는 인화 날짜가 83. 8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맞다. 나는 분명히 여름이었는데, 이웅평 소령이 2월에 넘어왔다면 그게 그날이 아닌데…. 인터넷을 검색했다. 83년에는 2차례 미그기 귀순이 있었다고 한다. 2월에는 북한에서 이웅평 소령이, 8월에는 중공군 손천근이 미그기 몰고 넘어왔다고 한다. 손천근은 넘어오고 대만으로 망명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 두 사건을 합쳐서 이웅평만 기억한다고 한다. 내가 문섬에 있던 날, 실제상황을 일으킨 것은 중공군 손천근의 귀순하는 날이었다.      


40년간 나는 잘못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한번 각인된 인식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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